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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짓밟힌 '적도 한인'을 기억하자

입력
2020.08.18 04:3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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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로 변한 인도네시아 중부자바주 암바라와 일본군 위안소의 올 1월 말 모습. 광복절 즈음 푯돌을 세우려던 계획은 코로나19로 인해 미뤄졌다. 암바라와=고찬유 특파원

화장실로 변한 인도네시아 중부자바주 암바라와 일본군 위안소의 올 1월 말 모습. 광복절 즈음 푯돌을 세우려던 계획은 코로나19로 인해 미뤄졌다. 암바라와=고찬유 특파원


장윤원. 1919년 3ㆍ1 운동 당시 일하던 은행 돈을 빼돌려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낸 사실이 발각돼 가족을 남겨두고 만주로 탈출, 중국을 거쳐 1920년 9월 20일 인도네시아 바타비야(현 자카르타)에 닿는다. 기록상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 역사의 서막이다. 1942년 3월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하고 투옥된다. 해방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47년 11월 23일 망명 생활을 죽음으로 마쳤다.

민영학, 손양섭, 노병한. 인도네시아 중부자바 암바라와에서 조선인 포로 감시원으로 일하던 1944년 12월 29일 '아세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라' 등 강령에 따라 결성된 고려독립청년당에 가입한다. 고려독립청년당원 26명은 일제 패망을 예상하고 연합군 포로수송선 탈취 거사 계획을 세운다. 갑작스런 전속 명령에 불만을 품은 3인은 1945년 1월 4~6일 일본군 십여 명을 죽인 뒤 모두 자결한다.

정서운. 1942년 8월 부산을 출발한 일본 선박에 오른 뒤 인도네시아에 일본군 위안부로 배속된 조선인 소녀 23명 중 한 명이자 종전 후 살아남은 것으로 전해진 암바라와 조선인 위안부 6, 7명 중 한 명이다. "처음에 인제 저녁에 장교 한 놈 오더라고. 술을 잔뜩 처먹고 오는 기라. 벌벌 떨릴 거 아이가. (중략) 그래 갖고 이제 강간을 당한 기지. 막 발악을 하고 그러니까 아편을 찔러 넣는 기라. 그만 중독이 돼버린 거라." 2004년 숨질 때까지 육성 증언을 남겼다. 덕분에 암바라와 위안소가 세상에 알려졌다.

작년 이맘 때 발자취를 쫓았던 일제 강점기 적도의 한인들이다.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 망명객으로, 무장항쟁 일원으로 목숨을 바쳤고, 위안부로 고초를 겪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암바라와 의거 현장과 위안소엔 푯돌 하나 세우지 못했다. 위안소는 여전히 화장실로 쓰인다. 우리 광복절보다 이틀 늦은 인도네시아 독립 75주년(8월 17일)에 그들의 이름이나마 다시 불러본다.

자카르타= 고찬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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