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DJ와 30여년 동반한 설훈 민주당 최고위원
“상대가 독재자가 아니라면 타협하는 게 DJ정신”
"'서로 원수를 져서는 일이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80 정도만 해야지, 100을 하려고 하면 거꾸로 60도 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된다.'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지요.”
영원한 ‘동교동계 막내’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정치 철학을 이렇게 회고했다. 숱한 핍박과 옥고를 치르고도 모든 정적에게 “용서”를 논한 정치 철학이 말뿐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설 의원은 고인의 11주기를 하루 앞둔 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완승을 하려고 하다간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는 DJ의 협치론을 연신 곱씹었다. 여권의 독주에 경고등이 들어온 요즘 상황을 돌이키게 하는 말이었다.
최근 민주당 지지율 급락의 배경을 놓고 설 의원은 “결국은 같이 가야 한다는 점, 타협을 해나가는 방법론에 대해 (민주당이) 다소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꽤 오래 동교동의 ‘막내 비서’로 통한 설 의원은 5선 중진이자 최고위원인 '당의 원로'가 됐다. 그가 민주당에 몸 담은 시간은 7선의 이해찬 대표보다 길다.
설 의원은 "'상대가 독재를 하겠다는 입장이 아니라면, 정치인은 무조건 절대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원칙이었다"며 "우리가 적폐를 청산하고 뚜벅뚜벅 걸어나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너무 가속도만 붙일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설 의원은 1953년 독립유공자 집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사학과 재학시절 유신 반대 시위를 이끌었고 긴급조치 9호 위반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옥고 치렀다. 문익환 목사의 권유로 DJ의 비서로 정계에 발을 들였고, 30여년 정치 인생을 동반했다. 2015년 분당 사태 때 많은 동교동계 의원들은 국민의당으로 향했지만, 설 의원은 'DJ의 고향'인 민주당에 남았다.
DJ를 ‘영원한 스승’이자 ‘인생 멘토’로 규정하는 설 의원은 정치의 고비마다 ‘대화와 설득’으로 돌파구를 찾은 DJ의 면모를 수 차례 강조했다. 설 의원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재판 과정을 회고하며 “당시 김대중 선생의 2시간에 걸친 최후 진술은 참 압권이었다”며 “도도하게 왜 자신이 무죄인지를 설득해 내는 모습을 보면서 신군부가 저 분을 그냥 두고는 도저히 정치를 할 수 없겠구나, 그래서 죽이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또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경의선 도라산역을 방문해 철도 침목에 서명을 한 것도 결국엔 대화와 설득의 힘이었다”고 덧붙였다.
설 의원은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ㆍ북미 관계에 대해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이 전격 타결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상황을 개선시켜나갈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고 기대했다. 또 “동해북부선 복원을 비롯한 남북교류협력 방안을 비롯해 남북한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복잡한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고 했다.
'막내'에서 '원로'가 된 스스로의 정치에 대해 설 의원은 “저는 권력 의지가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처음부터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고, 내 인생이 깨어져도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찾아간다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며 “앞으로도 좋은 사람, 좋은 당을 앞세워 세계 속의 대한민국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 외엔 별다른 구상이 없다”고 했다.
숱한 DJ 어록 중에 설 의원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자유가 들꽃같이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넘쳐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같이 아롱지는 시대”다. “당장 통일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통일로 가는 징검다리 하나씩을 놓고,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도 강국으로 향하는 세상을 후배들에게 물려줘야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 다음은 일문일답.
-DJ를 처음 만난 게 법정 아닌가.
“법정에서 처음 만났다.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숱한 고문 끝에 서울구치소에 들어가 보니 제게 공소장이 와 있는데 죄목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었다. 내가 만난 적도 없는 이 분과 왜 공범이 되나 싶었다. 혐의를 보니 사형을 받게 생겼더라. 광주에서 이미 수많은 분이 숨졌는데 군부가 김 선생(DJ)도 똑같이 죽이려고 하는구나 싶었다. 그러곤 1980년 여름 첫 재판을 받는데 재판정에서 처음 만났다. 23명의 공범이 다 앉고, 마지막으로 김대중 선생이 헌병들에게 양 팔을 붙들려 뚜벅뚜벅 걸어 내려왔다.
당시 헌병들이 피고인 한 사람 한 사람 옆을 모두 지키고 앞만 보라고 팔을 툭툭 쳤다. 그런데도 고개를 돌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화난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닌, 완전히 초연한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두어 달 동안 재판은 이 분이 어떤 사람인가를 관찰하는 과정이었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고문으로 조작된 엉터리 혐의라는 점을 진술했다. 처음에는 엄격하던 헌병들도 진술을 들으면 들을수록 모든 게 엉터리구나 싶어 태도가 변했다.”
-설 의원님 최후 진술도 화제가 됐다.
“저는 광주 이야기를 했다. 먼저 체포된 분들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상황을 몰랐다. 법정에서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있어서 제가 '우리가 왜 우느냐'고 했다. '이 눈물은 광주에 돌려야지 지금 울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 갔나. 이 눈물은 그 사람들에게 보내져야 한다. 나 하나가 죽더라도 우리는 멸망의 길로 갈 수 없다. 우리는 절대로 이길 것이다'고 했다.
다음 날엔 김대중 선생이 혼자서 2시간 동안 최후 진술을 했다. 압권이었다. 도도하게 이야기했다. 왜 우리가 내란음모를 했다고 볼 수 없는지. ‘아 이래서 저놈들이 김 선생을 죽이려고 하는구나’를 확실히 알게 된 과정이기도 했다. 저 양반이 지도자구나. 신 군부가 이 분을 두고는 도저히 해 나갈 수 없구나 하는 면모를 봤다.”
-정계 입문 시 문익환 목사 권유가 있었다고 들었다.
“1985년 4월 1일 연금해제 직후에 비서로 합류했다. 문 목사께서 ‘김대중 선생을 혼자 두면 안되기 때문에 자네가 가서 재야와 김 선생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해달라’고 하셨다. 김홍일 위원도 찾아왔다. 그때부터 늘 숱하게 ‘자네는 이걸 배워야 해, 공부해 둬야 해’라는 말씀을 늘 하며 가르치셨다. 당의 운영 원리, 국회가 돌아가는 방식, 정치의 본령에 대한 말씀을 틈나는 대로 하며 실력을 키우라고 하셨던 기억이 자주 난다.”
-‘막내 비서’로 불린 시절이 길다.
“1985년부터 1990년도까지도 실제 막내였다. (DJ가) 호남 분이라 주변에 호남 출신 비서진이 많았는데 저는 드물게 영남(마산) 출신 아니었나. 영남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함께 있다는 점 때문에 선배들이 저를 참 예뻐해 줬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도 그러시고, 선배들도 그러시고, 그래서 더 막내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일도 주로 막내 몫을 맡았나.
“어려운 분들 돕는 것을 너무 좋아하셨다. 제가 주로 그런 작업을 맡았다. 평소 ‘정치를 왜 하느냐’에 대해서 ‘돈이 있거나 힘이 있는 사람은 그냥 둬도 잘 살아가지만, 가난하거나 힘이 없는 사람은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하셨다. ‘그래서 정치를 하는 것이고 정치의 본령은 그런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고 몸소 실천했다. 재야 활동가나 어려운 학생들의 사정을 알게 되면 저를 통해 그쪽을 돕는 식이었다.”
-그런 정치의 본령에 대해 다룬 DJ 어록이 많은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자유가 들꽃같이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넘쳐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같이 아롱지는 시대’다.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를 3대 위기 극복을 늘 당부하셨고, 마지막까지도 강조했다. 참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말인데 자유와 정의에 대해서는 자주 말해도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라는 말까지는 잘 안 쓴다. 사실 저는 그게 가장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여러 사람의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를 만들었지만 통일은 아직도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그래도 우리가 계속해서 주춧돌을 놓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주 오래 전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져온 지론이다. 1970~1980년대에 민주주의가 먼저냐 통일이 먼저냐의 논쟁이 치열할 때도 단호히 민주주의부터 돼야 통일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고, 결국 그 뜻대로 되고 있다고 본다.”
-최근 북미ㆍ남북 관계 교착상태를 DJ의 혜안을 빌려 풀고자 한다면 방법이 있을까.
“두 가지 작업을 해야 한다. 우선 내부에서 보수적 사고를 가진 분들에 대한 설득을 잘 해야 한다. 왜 남북관계가 좋아져야 하는지, 왜 북쪽을 도우며 일을 풀어나가야 하는지를 차근히 설명해야 한다. 둘째는 미국에 대해서도 확실히 상황을 이해시키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미국은 생각보다 북한 문제에 대해 모르면서 주장하고 끌고 나가는 측면이 있다. 그런 작업들을 선행해 가면서 대화해 나가야 한다.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회담만 해도 북쪽이 영변 핵을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당시에 그걸 받고 나머지 3할에 해당하는 다른 핵은 차차 정리하자고 했으면 지금쯤 상황에 훨씬 쉽게 풀리고 있었을 거다. 그런 점들을 다시 잘 납득시켜야 한다.”
-대화와 설득이 사실 제일 어렵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 대화와 설득을 참 제대로 하신 분이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까지도 설득을 해냈으니, 나중엔 부시 전 대통령이 우리 측 설명에 따라 행동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많이 바꾸기도 하고 높이 쳤다. 그러다 보니 도라산역에 가서 철도 침목에 서명도 하지 안았나. 대화와 설득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다. 한반도 운전자론에 대해서 내부를 향해, 미국을 향해 충분히 서로의 이익을 확보하면서 우리가 불안해하지 않고 풀어나갈 여지가 있다는 점을 납득시키는 일들이 지금은 필요하다.”
-‘경제 교류 협력 모델’을 꾸준히 강조했는데.
“동해북부선 복원 등은 전형적으로 남북한이 ‘윈-윈’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북측은 예전부터 늘 철도를 연결해 서로 좋은 방향으로 가자고 제안해왔지만 그간 보수 정권들이 소화를 못 해냈다. 오히려 지금 와서 해내려니 북핵이라는 복잡한 문제가 생겨 꼼짝을 못하는 상황이다. 시간을 놓쳤던 게 참 안타깝지만 지금이라도 해결 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본다.”
-대화는 국회에서도 잘 안 풀리는 중이다. DJ였다면 최근 국회 상황을 어떻게 풀었을까.
“DJP(김대중+김종필) 연합까지 하신 분 아닌가. 지금 살아 계셨으면 어떻게든 야당과 대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을 것이다. 이 상황을 ‘같이 타개하자’ 했을 것이다. 완승하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같이 살자’하는 게 그 분 생각이다. 심지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용서를 한 게 아닌가. 옥수수 박사로 유명한 김순권 경북대 명예교수(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대북관련사업자문위원) 말씀도 자주 인용했다. 옥수수를 키울 때 일정 정도는 벌레가 먹는 부분을 둬야지, 그걸 전부 없애고 키울 생각을 하면 키울 수가 없다는 얘기다.”
-너무 완승을 하려다간 그르칠 수 있다는 의미인가.
“서로 원수를 져 가지고는 일이 안 된다는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80 정도만 해야지 100을 하려고 하면 60정도도 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생긴다는 의미다.”
-최근 여당 지지율에 경고등이 켜졌다.
“주택 문제, 박원순 전 서울시장 관련 젠더 문제, 수해 상황 등등이 겹쳤다. 임대차 3법과 부동산 3법은 작동되고 효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 일종의 과도적 상황이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 정착이 되면 시장이 안정을 찾고 그러면 일정 정도 회복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협치 부분도 영향을 준 건 아닌가.
“그 점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타협을 해 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 한다고 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라면 절대 타협은 해야 한다는 입장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다만 원칙을 가지고 타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다. 상대가 독재를 하겠다는 입장이 아니라면 타협을 해 나가야 한다.”
-오늘날 여당에 그런 정신이 부족했다고 보나.
“분명히 적폐는 청산하고 가야 할 길은 뚜벅뚜벅 가야 한다. 다만 너무 속도가 붙고 가속이 되면 아니한 만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완급을 조절하면서 나가는 게 필요하다. 물론 말이 쉽지 어떨 때 급해야 할지, 느려야 할지 그 판단은 참 어렵다.”
-정적까지 용서한 점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것 같다.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해코지를 한 사람이 얼마나 많나. ‘그냥 다 둬라’ 라는 말씀을 쉽게 하셨다. 당신을 괴롭히고 못된 짓 한 분들이 그렇게 많은데 우리 같으면 그냥 두겠나. 그런데 늘 ‘내버려 둬라’ 하셨다. 돌아보면 단 한 사람도 핍박 당한 사람이 없다. 다 안아 버렸다. 대인이 아니면 못한다.”
-2020년 한국사회가 돌아볼 DJ의 업적으로는 무엇을 꼽나.
“IMF 외환 위기 극복, 남북관계 진전, 의료보험체계 정상화 등 숱한 업적이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문화적 측면을 훨씬 높이 평가한다. 한류의 시작이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나왔다고 본다. 이를테면 당시 영화계에서 ‘한국 영화가 잘 되지 않는 이유가 소재의 제약이 많아서’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남북관계에 대한 묘사 등 이전까지 금기 시 됐던 모든 것을 다 풀면서 ‘쉬리’ ‘JSA 공동경비구역’ 같은 영화도 나왔다. 그런 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금은 방탄소년단(BTS)과 영화 '기생충' 등이 저력을 발휘하는 게 아닌가 싶다.”
-영원한 ‘막내’가 원로가 됐다. 당 안팎의 리더십과 관련한 구상은 없나.
“세월이 그만큼 흘러 아이가 어른이 된 거다. 그런데 저는 권력 의지가 없다. 처음 감옥에 갈 때도 국회의원이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안 했다. 내 인생이 깨어져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찾아야 할 것 아니냐. 일제에 저항해 묵묵히 죽어간 선열이 있는데 그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것 아니냐, 그런 심정이었다. 후배들에게 요즘도 자주 이야기 한다. 국회의원 되려고 생각해 본 적 있느냐. 지금 참 행운이 겹쳐 다들 의원도 되고 했는데, 더 욕심 부릴 게 뭐가 있냐.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도 늘 했던 말이다. 뭘 더 바라느냐고. 대한민국이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가는데 이바지 하겠다는 생각 외에 내가 뭘 하겠단 생각 자체가 없다.”
-'이바지'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민주당을 좋은 당으로 만들고, 좋은 대통령을 배출하는 거다. 대한민국이 세계 강국으로 가는 목전에 있다. 경제적으로 세계 10위 국가이고, 문화적으로 대단한 나라임에 틀림 없다. ‘이게 나라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갖춰 가고 있다. 더 확실하게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을 놓아야 한다. 통일의 징검다리도 놓아야 한다. 통일이 물론 당대에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서로 전쟁 위협에서 벗어나 함께 살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게 곧 통일 아니겠나. 그건 당대에 해내야 할 것이다. 그런 '자유가 들꽃같이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넘쳐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같이 아롱지는 시대’를 후배들에게 물려 주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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