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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사람도 꺼려하던 그곳, 걷기 명소로 환골탈태

입력
2020.08.15 08:30
수정
2020.08.18 10: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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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대구 수성못 둘레길
1927년 축조한 농업용저수지, 도시화로 기능 잃고 수질오염 몸살
생태복원 통해 전국적 관광명소 우뚝

수성못 둘레길 데크로드의 경관조명이 환상적인 야경을 연출하고 있다. 수성구 제공

수성못 둘레길 데크로드의 경관조명이 환상적인 야경을 연출하고 있다. 수성구 제공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가 낳은 민족저항시인 이상화(1901~1943)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년 발표)’의 첫 구절이다. 이상화 시인이 시심에 영감을 준 ‘빼앗긴 들’은 대구 수성구 수성들(옛 경북 달성군 수성면)이라고 한다. 이 빼앗긴 들에 물을 대던 저수지가 수성못이다.

수성못은 도시화와 함께 농업용 저수지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 유원지로 지정됐다. 하지만 개발은 지지부진했다. 못 둑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포장마차촌이 형성됐다. 주변에는 막걸릿집 등 허름한 음식점들이 진을 쳤다. 시민 휴식공간이 아니라 시민 기피 공간으로 전락했다.

이 같은 수성못이 환골탈태했다. 시민 휴식처이자 전국적 관광명소가 됐다. 수많은 사람이 걷고 또 걷는 걷기 명소다. 특히 고운 마사토길은 전국 최고의 맨발 걷기 체험장으로 변모했다.

시민들이 벚나무 그늘이 우거진 수성못 둘레길 마사토 산책로를 맨발로 걷고 있다.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시민들이 벚나무 그늘이 우거진 수성못 둘레길 마사토 산책로를 맨발로 걷고 있다.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수성못 둘레길 수변무대에서 지난 9일 밤 공연단원들이 버스킹을 하고 있다.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수성못 둘레길 수변무대에서 지난 9일 밤 공연단원들이 버스킹을 하고 있다.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수성못 둘레길 데크로드.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수성못 둘레길 데크로드.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대프리카 폭염 속' 맨발 걷기족 성지 부상

중부 지역에 폭우가 위세를 떨치던 지난 5일 낮 수성못 둘레길. 낮 최고 33도의 무더위 속에서도 너비 5~6m의 둘레길에는 제법 많은 시민들이 산책 중이었다. 일부 시민들은 맨발로 산책로를 걸었다. 후텁지근한 날씨였지만 둘레길을 따라 선 벚나무와 왕버들 그늘 덕분에 뙤약볕을 피할 수 있었다.

산책하는 시민 대부분은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 친구들과 함께 ‘인생샷’을 찍는 여성, 홀로 둘레길 주변의 동식물을 렌즈에 담는 시민 등의 얼굴엔 활기가 넘쳤다. 못 남쪽 오리배 선착장 계단에는 초로의 남자 둘이 색소폰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시계 반대 방향 동남쪽 길에는 못 안쪽으로 나무 데크로드가 나 있다. 그 사이에 부들 연 갈대 붓꽃 꽃창포 등 수생식물이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 사람의 눈을 편안하게 해 준다. 물고기 등 수중 동물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준다.

수성못 역사보다 오랜 고목 왕버들 '우뚝'

저수지 동북쪽 코너엔 고목 한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수령 100년은 족히 돼 보인다. 저수지가 생길 때부터 있었던 왕버들이다. 둘레길 곳곳에 조성된 작은 무대에선 수시로 버스킹이나 비보이 공연 등이 열린다. 이상화를 중심으로 한 시문학 거리, 그를 기리는 상화동산도 걷기의 지루함을 덜어준다. 못 안쪽 작은 ‘둥지섬’ 나뭇가지 위에는 백로가 하얗게 앉아 휴식하고 있다. 못 주변 잔디광장과 태양광발전소, 조망데크, 전망대, 수변무대, 운동기구, 농구장, 음용수대 등이 수성못이 관광명소가 된 이유를 웅변한다.

주부 조모(40)씨는 “요즘은 날이 더워 오전에 주로 맨발로 걷는다. 밤이 더 시원하지만 전국에서 몰려온 인파로 운동하기엔 부담스럽다. 고운 마사토 산책길이 걷기에 그만이다. 발바닥을 자극하는 게 온몸이 다 시원해진다. 세족장도 있어 불편함이 없다. 아침에도 점심때도 저녁에도, 심지어 한밤중에도 걷는 곳이다. 건강을 안겨주는, 건강한 길이다”며 수성못 둘레길 예찬론을 펼쳤다.

대구 수성못 둘레길에 활짝 핀 벚꽃이 상춘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수성구 제공

대구 수성못 둘레길에 활짝 핀 벚꽃이 상춘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수성구 제공


시민들이 수성못 둘레길에 있는 수령 100년 이상 왕버들 아래를 산책하고 있다.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시민들이 수성못 둘레길에 있는 수령 100년 이상 왕버들 아래를 산책하고 있다.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수성못 영상음악분수. 밤이 더욱 아름다운 수성못을 만들어 주고 있다. 수성구 제공

수성못 영상음악분수. 밤이 더욱 아름다운 수성못을 만들어 주고 있다. 수성구 제공


수성못은 걷기뿐만 아니라 봄이면 벚꽃놀이의 명소로, 겨울이면 얼음썰매장이 된다. 수면에는 오리배가 친구나 연인,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다. 못 주변으로 눈을 돌리면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나 카페, 빵집, 퓨전 레스토랑 등이 즐비하다. 놀고먹고 마시고 즐기며 운동하기에 그만인 곳이다.

대구에는 일제 강점기 때 민족저항시인 이상화 시인을 모티브로 한 공원이나 길, 시비 등이 많다. 달서구의 상화로, 달성공원의 상화 시비, 수성못 북동쪽에 조성한 상화동산이 대표적이다.

민족저항시인 이상화 동산ㆍ시문학거리도 있어

상화동산과 수성구 시문학 거리는 이상화의 시 세계를 기리고 수성못 둘레길을 찾는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2015년 조성됐다. 이곳에는 이상화와 그가 등단한 ‘백조’ 동인들이 등장한다. 현진건 박종화 백기만 나도향 이장희 홍사용의 대표작 등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자 일제강점기 대표적 저항시인 ‘빼앗길 들’을 발표(1926년)할 당시 활동한 ‘카프’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카프(KAPF)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사회주의 문학단체였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고교 국어 시간 문학사를 배울 때도 얼렁뚱땅 넘어갔고, 지금도 수성못 시문학거리에선 터부시되고 있는 듯하다.

수성못 둘레길 상화동산 인근에 민족저항시인 이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와 그의 흉상이 나란히 서 있다.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수성못 둘레길 상화동산 인근에 민족저항시인 이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와 그의 흉상이 나란히 서 있다.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맨발 걷기의 명소, 수성못 둘레길에 수성구청이 설치한 세족장.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맨발 걷기의 명소, 수성못 둘레길에 수성구청이 설치한 세족장.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수성못 표지석.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수성못 표지석.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수성못 둘레길 오리배 선착장 앞에서 초로의 남성 2명이 색로폰 삼매경에 빠져있다.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수성못 둘레길 오리배 선착장 앞에서 초로의 남성 2명이 색로폰 삼매경에 빠져있다.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대구가 낳은 민족저항시인 이상화, 그를 기린 상화동산 입구.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대구가 낳은 민족저항시인 이상화, 그를 기린 상화동산 입구. 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수성못은 1927년 축조됐다. 106만3,778㎡ 부지에 저수량은 70만톤 정도다. 둘레길은 2,020m다. 1924년 대구 인구 증가에 따라 신천 물을 상수도로 쓰게 되자 부족해진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서 축조를 시작했다. 일본인 미즈사키린따로(水崎林太郞)와 조선인 대지주 4명 등이 주축이 돼 수성 수리조합을 설립했다. 지금은 한국농어촌공사가 부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유원지는 빈발… 전국 최대 포장마차 수질오염 부채질

지금은 전국 최고의 호수공원 중 하나이지만, 월드컵 이전만 해도 대구 최고의 기피 장소 중 하나였다. 말로만 유원지였다. 1990년대 초반까지 대학가 신입생 환영회 1번지라곤 하지만 이곳을 거쳐 간 신입생 중에 유쾌한 기억을 가진 경우는 드물다.

특히 농업용수로도 쓸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물이 문제였다. 주범은 주변 주택가 생활하수와 못 둑을 점령한 기업형 포장마차였다. 1986년 우ㆍ오수 분리시설을 하고 못 바닥까지 준설했지만 맑아지지 않았다. 1989년 화학적 산소요구량(COD)는 11.3㎎/ℓ으로로 환경기준치 5배를 초과했다. 생활용수는커녕 농업용수로도 쓸 수 없었다. 생활하수와 포장마차에서 마구 버린 음식물쓰레기 등이 수질을 악화시켰다.

포장마차는 1975년쯤부터 하나둘 생겼다. 1990년 ‘범죄와의 전쟁’에 따른 유흥업소 심야영업 규제로 급증했다. 한때 100개 가까이 성업했다. 자정까지 유흥업소에서 술을 마시던 취객들은 남구 봉덕동 일대 불법 영업 ‘카페’나 이곳 포장마차촌을 찾았다. 수질도 더욱 나빠졌다.

수성못 재생의 전기는 2002월드컵에서 마련됐다. 포장마차촌 정비에 잇따라 실패하던 대구시와 수성구는 2000년 말 완전 철거에 성공했다. 1998년 심야영업규제 폐지로 포장마차가 경쟁력을 잃은 것도 한몫했다.

2002년엔 인근 주택가 하수를 고도처리하는 지산하수처리장도 준공했다. 하루 처리용량 4만5,000톤 규모다. 대구 최초로 지하에 건설한 환경기초시설이기도 하다. 처리장 위에는 잔디광장과 농구장 등 편의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하수처리장건설ㆍ생태복원사업 통해 시민 품으로

수성구는 2010~2013년 수성못 생태복원사업을 했다. 둘레길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흙길을 조성했다. 신천의 맑은 물을 못으로 끌어들인 뒤 범어천과 물길을 연결했다. 동편에 마사토 산책로를 새로 만들어 2,020m 전체를 연결했다. 또 데크로드 180m, 전망데크 5개소, 관찰데크 1개소, 수변무대 1곳을 설치했다. 이후 편의시설을 지속 확충, 지금은 수상 무대까지 갖췄다. 물비린내도 사라졌다. 이후 이곳에선 철인3종경기 수영경기가 열릴 정도가 됐다.

앞서 2007년엔 길이 90m에 70m 높이까지 물을 뿜는 전국 최대 규모의 수상 영상 음악분수도 설치했다. 화려한 수중조명과 음악에 맞춰 춤추는 음악분수는 밤길이 더 아름다운 수성못 둘레길을 만들었다. 5~10월 동안 하루 4차례 가동한다. 야간 공연 기준 6, 7월에는 오후 8시30분, 9시30분, 5, 8~10월엔 오후 8, 9시 두 차례씩이다.

고질적인 주차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됐다. 지난해 호텔 수성이 문을 열면서 977대의 부설 주차장을 3시간 무료 개방하고 있다. 주말엔 호텔 고객 우선이지만, 아직 주차장은 여유가 많은 편이다. 여기에다 69대를 댈 수 있는 공영주차장도 새로 조성했다.

생태복원사업이 완료되면서 주변 상가도 확 변했다. 막걸릿집 등은 하나 둘 사라졌다. 그 자리는 현재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카페, 퓨전레스토랑이 차지하고 있다.

수성못을 찾는 사람들의 연령대도 변하기 시작했다. 인근 주민과 중장년층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젊은 층이 더 많을 정도다.

김병희 수성못상가연합회 회장은 “몇 십년에 걸쳐 수성못 주변 상가는 불법적 요소가 사라지고 깨끗하고 편안한 거리로 탈바꿈하면서 주민은 물론 전국에서 찾는 대구 대표 거리가 됐다”며 “성인을 위한 놀이시설이 부족하다는 말이 많은데, 번지점프나 집라인 같은 시설이 생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올해 들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모두가 어려운 때 일대 건물주 70%가 월세를 내리는 등 위기 극복에 동참하고 있다”며 “상인들이 앞장서서 전국에서 찾는 거리를 만들겠다”강조했다.

수성못


대구= 정광진 기자
대구= 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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