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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원씩 모아 아기를 살렸다' 기부 1등 국가의 기적

입력
2020.08.13 04:30
수정
2020.08.13 10:4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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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잘 베푸는 나라

편집자주

인도네시아 정부 공인 첫 자카르타 특파원과 함께 하는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 통일)'의 생생한 현장.

2018년 세계기부지수 1위, 최근 10년간 10위... 현지인들이 말하는 기부 비결은

신부전을 앓는 퀸의 상태가 기부 전후로 달라졌다. 키타비사 제공

신부전을 앓는 퀸의 상태가 기부 전후로 달라졌다. 키타비사 제공

수마트라섬 람풍주(州) 반다르람풍에 사는 2018년 10월생 퀸은 태어날 때부터 신부전을 앓고 있다. 사흘마다 혈액투석을 해야 한다. 혼수상태에 빠져 중환자실에 여러 번 실려 갔다. 퀸의 부모는 6년 전 첫 아기를 신부전으로 잃었다. "미래는 모른다, 당장 퀸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남은 돈으로 비행기표를 끊어 수도 자카르타에 왔다.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치료를 접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퀸의 사연이 알려지자 한 재단을 통해 올 1월 말 모금이 시작됐다. 한 달만에 목표액을 훌쩍 넘는 1억5,500만루피아(약 1,300만원)가 모였다. 1,000루피아(80원)라도 퀸이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기꺼이 기부한 보통사람들 덕이다. 퀸의 상태는 호전됐다. 치료 과정은 더없이 길고 어렵겠지만 퀸은 이제 외롭지 않다. 기부자 2,000명이 함께 병마와 싸운다.

인도네시아는 기부가 생활습관이다. 거리 악사와 걸인에게 푼돈을 흔쾌히 나눈다. 빈민, 환자, 동물, 사원 건립, 온라인 모금 생중계, 마라톤 초당 적립 등 기부 대상과 방법도 다양하다. 명절마다 기부하는 걸 당연히 여기고 거의 매일 기부를 실천하는 이들도 많다. 주변에 부모가 사망한 아이들은 형편이 어려워도 거두어 키운다. 베풀었다고 생색을 내지도 않는다. 인간의 도리라 여긴다.

우비를 입고 일하는 의료진을 위해 방호복 기금을 모은 인플루언서 라헬 벤냐씨. 일일 모금액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콤파스 캡처

우비를 입고 일하는 의료진을 위해 방호복 기금을 모은 인플루언서 라헬 벤냐씨. 일일 모금액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콤파스 캡처

예컨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초기인 3월 방호복이 부족해 의료진이 우비를 입고 환자들을 돌본다는 소식에 인스타그램의 유명인(인플루언서) 라헬 벤냐씨가 모금에 나서자 하루만에 20억루피아(약 1억6,000만원)가 모였다. 그 공로로 한 기관의 수상 대상에 올랐지만 라헬씨는 사절했다. "기부에 참여한 13만5,000여명의 공이고 관심은 오로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집중돼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92억루피아(약 7억6,000만원)를 모금한 뒤 각 병원에 방호복을 나눠줬다.

몇 가지 특별한 사례와 대강의 분위기로 일반화하는 건 아니다. 인도네시아는 2018년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베푸는 나라로 뽑혔다. 영국 자선지원재단이 기부금액, 봉사시간, 낯선 사람 돕기를 따져 매년 발표하는 '세계기부지수'에서 1위를 한 것이다. 이듬해 발표한 10년치(2009~2018년) 종합 기록에서도 10위에 올랐다. 미국(1위) 뉴질랜드(3위) 등 대부분 서양 국가이고 아시아에선 미얀마(2위) 스리랑카(9위) 인도네시아만 상위권에 있었다.

5대 의무로 빈민 구제(자카트)를 실천하는 무슬림이 87%인 인구 구성이 영향을 미쳤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슬람 종주국인 중동 국가들은 잘 베푸는 나라 순위가 10위권 밖이다. 인도네시아인에겐 어떤 특별한 DNA가 있을까, 자카르타 시민들에게 물었다. 이들은 적어도 한 달에 한번, 많게는 매일 기부를 한다고 했다.

기부금을 모아 버려진 개(왼쪽 사진)와 굶주리는 오랑우탄을 돕는 모습. 키타비사 제공

기부금을 모아 버려진 개(왼쪽 사진)와 굶주리는 오랑우탄을 돕는 모습. 키타비사 제공

물론 이슬람 교리에 따른다는 응답이 많았다. 회사원 리스카(35)씨는 "알라의 축복을 받기 위해", 유수브(27)씨는 "내 재물의 일부는 다른 사람의 것이니 베풀라는 이슬람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슬람사원의 모금함이나 종교재단에 기부하는 걸 선호했다. 액수는 한번에 5,000~1만루피아(약 400~800원), 한 달에 20만~30만루피아(약 1만6,000~2만5,000원) 정도다.

사립대 교수인 헤리(54)씨는 교육의 힘을 꼽았다. 그는 "학교와 집에서, 모든 종교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자연스레 몸에 밴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5대 국가 이념 '판차실라'의 첫 번째가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라 현지인들은 6개 공인 종교(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유교) 중 하나를 믿는다. 타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가 없는 사람, 즉 무교(無敎)를 이상히 여긴다.

인도네시아의 전통인 '고통 로용' 정신도 빼놓을 수 없다. 함께(Royong) 어깨에 진다(Gotong)는 뜻의 고통 로용은 우리의 두레나 품앗이와 닮았다. 대학 교수인 디안(32)씨는 "다른 사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면 기꺼이 돕는 게 우리 문화"라며 "액수는 상관 없다"고 했다. 남이 어려울 때 돕는 건 결국 자신을 돕는 길임을, 도움을 받으면 갚아야 한다는 삶의 이치가 대대로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다.

광대 분장을 한 기부자가 생계가 어려운 노인과 함께 기념 촬영하고 있다. 키타비사 제공

광대 분장을 한 기부자가 생계가 어려운 노인과 함께 기념 촬영하고 있다. 키타비사 제공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한결같이 "(물질이) 적더라도 자주 하는 습관이, 받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값지다"고 강조했다. "남에게 베풂은 나에게 행복"이라는 공식은 종교, 교육, 전통을 관통했다.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인도네시아를 앞선다고 자부하는 우리나라의 세계기부지수는 2018년 60위, 2009~2018년 57위였다.

자카르타= 고찬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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