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무대 위 삶 위해 무대 밖 삶에 침묵하다

입력
2020.08.09 14:00
21면
0 0

편집자주

‘대학로 블루칩’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이 공간, 사람, 사물 등을 키워드로 무대 뒤 이야기를 격주 월요일자에 들려드립니다.


배우들은 분장실에 자신을 삶을 놓아두고 무대에 오른다. 게티이미지뱅크

배우들은 분장실에 자신을 삶을 놓아두고 무대에 오른다. 게티이미지뱅크


분장실 (扮裝室) [명사] 배우를 꾸미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물품을 갖추어 놓은 방.

배우 A는 항상 공연 20분 전 이곳에서 청포도 사탕을 먹는다. 사탕이 녹는 동안, 그는 침묵에 빠진 채 대본을 읽는다. 그에게 청포도 사탕은 기도와 같다. 배우 B는 무대로 들어서기 직전, 이곳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무대로 나갔다. 공연을 마치고 이 곳에 다시 들어오자마자 비로소 통곡했다.

배우 C는 오랫동안 절연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공연 보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날 밤 그는 집에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았다. 밤새 연습했다. 슬프게도 그는 쉰 목소리로 무대에 섰고, 아버지는 그의 쉰 목소리가 불쌍하다고 보는 내내 울었고, 그리하여 그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이곳에 들어와 쉰 목소리로 울었다.

이곳이 바로 분장실이다.

무대는 배우가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공간이고, 분장실은 배우가 다른 인물로 변하는 공간이다. 규모 있는 극장은 무대와 분장실이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작은 소극장은 무대와 분장실 사이에 벽 하나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어찌 보면 모두 한 무대에 있는 셈이다. 배우를 위한 공간도, 배우가 되기 위한 공간도, 그리고 그 배우를 보기 위해 모인 관객의 공간도.

공연 20분 전 극장 문이 열리면, 관객은 조심스레 객석으로 들어온다. 공연을 기다리는 20분 동안, 관객은 숨을 죽이고 있다. 관객은 알고 있다. 저 무대의 벽 바로 뒤에서, 배우가 기다리는 중이라는 걸. 배우 또한 알고 있다. 이 분장실 벽 바로 뒤에서 관객이 기다리는 중이라는 걸.

그래서 그 20분간, 극장에는 침묵이 흐른다. 20분 후의 배우를 기다리는 침묵, 20분 후의 관객을 기다리는 침묵, 벽 너머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상대방이 마지막 숨을 쉴 수 있도록 자신의 숨을 멈추는 시간. 참 아름다운 침묵이다.


분장이란 다른 얼굴로 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지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게티이미지뱅크

분장이란 다른 얼굴로 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지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게티이미지뱅크


분장은 자신의 얼굴을 다른 얼굴로 꾸미는 일이다. 매일 매일, 공연 3시간 전, 어제의 열기가 식지 않은 빈 극장에 도착해서, 거울 너머 자신의 얼굴을 본다. 아직은 배우의 얼굴이 아닌, 극장 바깥에서 살아가는 현실의 얼굴. 밤새 대리운전을 하다가 쪽잠을 자고 온 배우 D의 얼굴, 벌써 세 번째로 전세대출 퇴짜를 맞아서 갈 곳이 막막한 배우 E의 얼굴, 고양이가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틈만 나면 찾으러 다니는 배우 F의 얼굴.

그들은 밤새 지었던 웃음과 피로와 눈물의 표정을 극장 바깥에 둔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분장실로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묵묵히 어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얼굴 위에, 오늘의 얼굴을 천천히 바르기 시작한다.

한 위대한 배우가 1막을 마친 후, 분장실에서 삶의 마지막 숨을 쉬고 떠났다. 다음날, 배우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분장을 하고, 등장인물이 되어 무대에 섰다. 공연이 끝나고, 박수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눈물이 분장을 지웠고, 그들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그 위대한 배우에게 보내는 최고의 예우였다.

분장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얼굴로 변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지우는 과정일 것이다. 잠시 후 다가올, 관객과의 아름다운 침묵을 위해서, 배우는 잠시 자신의 삶에 침묵하는 것이다. 오늘도 세상의 모든 극장에서, 그들의 침묵이 무사히 흐를 수 있기를.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