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늘 타당한 것은 아니다. 입에 달고 살았던 말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침묵을 다 금으로 대접하면 무지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 동의한다. '부부는 이심이체라고 결론 내리는 순간, 신기할 정도로 부부싸움의 횟수가 줄었다(임재양 '의사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침묵은 금이 아니고,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다.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하는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 한동일, '라틴어 수업'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이고 있지만 누군가와의 만남과 소통은 필요했다. 일을 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시간은 갖고 싶었다. 쪼그라들고 낡아서 결국은 사라져버릴 '내가 공부한 것'을 아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미국과 영국에 살았고, 매년 영국을 오가며 배웠으니, 남에게 줄 것이 있을 거다. 내가 아는 만큼의 영어를 쓸모 있게 만들기로 했다. 공부한 것을 남에게 주기로 했다.
"이 나이에 무슨 공부?"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는데 뭐하려고?"라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좋은 기회가!"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가르쳐주는 거다. 그런 사람과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비슷해서 만나면 즐겁다. 늘 표면에서 겉도는 관계가 지루했는데,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니 대화가 흥미롭다. 나 같이 친구가 많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소중하다. 서로를 더 많이 알게 되고 친밀해져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된다.
내 영어는 배움의 장소가 따로 없고, 살면서 배운 게 크다. 책에서 배운 것도 있지만, 영국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텔레비전과 영화를 보면서, 그야말로 생활하면서 배운 거다. 여태 배운 것을 죄다 끌어다가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가르쳐주면 좋을 것 같아' 하는 방식으로 가르쳐준다. 두 사람이 각각 매주 두 시간씩 공부하는데,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자유롭게 항아리에 돈을 넣고, 모이면 기부하기로 했다.
회화책보다 생활언어가 더 다양하게 등장하는 소설책으로 단어의 여러 가지 쓰임을 공부한다. 중간 중간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거나, 내가 알고 겪은 영국의 문화와 경험을 섞기도 하는데,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공부하면서 도중에 생각나는 게 있으면 옆길로 빠져 다른 단어를 공부하거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다른 표현을 공부하기도 하는데, 나는 이런 즉흥성이 꽤 즐겁다. 배우는 사람이 "공부가 재밌다"고 말해주면 "맞아. 공부는 재미있으면 되는 거야"라며 마음이 차오르고, "고맙다"고 말해주면 은근 뿌듯해진다.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일을 가벼운 느낌으로 시작했다. 즐거우면 계속하고 상상했던 것과 다르면 수정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손 놓고 있었던 영어를 다시 집어 들고, 예전에 기록해 놓은 노트를 꺼낸다. 여럿이 모여 함께하는 일은 쉽지가 않고, 많이 모아서 크게 돕는 일은 힘이 드는데, 가지고 있는 것을 주는 일은 어렵지가 않다. "그동안 무얼 하고 살았던가?" "여태 해놓은 게 아무 것도 없네"라던 공허한 마음이 슬며시 채워지는 것도 같고, 긴장감 없이 느슨했던 일상이 좀 탄탄해지는 것도 같다.
자신의 생활 활동을 통해 기부를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낸 게 아니다. 영국 사람들에게는 이미 일상화되어 있는 일이고, 우리나라 유명인들도 많이 실천하고 있다. 남을 위한 일과 나를 위한 일이 다르지 않다. "남에게 무언가를 줄 때는 서둘러야 한다. 사과든 귤이든 옷이든 내가 필요 없어졌을 때 주는 건 못 써. 미루지 말고 당장 줘야지.(오치아이 게이코, '어른의 끝맺음')"라는 말이 지금 아니면 평생 못할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전에는 묻지 않았던 질문을 하게 만든다. 줄 수 있는 것을 주지 않으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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