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위만 쳐다보며 살아왔다. 도시의 하늘을 빼곡히 수놓은 마천루부터 하늘 너머 우주까지 정복하겠다며 시작한 달과 화성 탐사까지. 위를 향한 욕망은 인류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반면 우리는 발 밑의 세상에 대해선 잘 모를뿐더러, 굳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희미한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땅 속은 죽음과 상실, 슬픔과 공포만이 가득한 버려진 세계라고 무시했다.
“보지 않았으면 침묵하라.” 인류의 오랜 무지와 편견에 책 ‘언더랜드’는 이렇게 항변하는 듯하다. 영국의 자연 작가 로버트 맥팔레인은 대지 아래로 기어 내려가 땅 밑 세계가 얼마나 엄청난지 눈 앞에 펼쳐 놓는다. 지하 세상엔 “두렵기에 버리고 싶고, 사랑하기에 지키고 싶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곤히 잠들어 있던 선사시대의 동굴예술부터, 지하도시와 묘지, 핵폐기물 처리시설까지. 6년 동안 지하세계를 탐험한 저자는 비로소 깨닫는다. 지상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발 밑에는 더 큰 가능성과 진리가 숨어 있었다는 걸 말이다.
지하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일깨운다. 저자가 지하 900m 암염층에 자리 잡은 연구실에서 만난 젊은 물리학자는 우주공간에서 가장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인 ‘암흑물질’을 연구하고 있었다. 우주 질량 중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5%뿐. 나머지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미지의 물질이다. “지상에선 공기 중 입자들이 움직이는 소리 때문에 암흑물질을 연구할 수가 없어요.” 우주의 진짜 비밀을 풀기 위한 가장 적합한 공간은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깊은 지하란 게 아이러니하다.
지하세계는 땅 위의 지식과 가치도 뒤집어 버린다. 지상에서 곰팡이는 식물에 질병과 장애를 일으키는 해로운 기생충 정도로만 취급됐다. 하지만 지하에서 곰팡이는 나무와 숲의 생태계를 살리는 마지막 보루다. 곰팡이 균사의 실타래는 나무 뿌리를 따라 광합성 산물을 이동시키며 병든 나무를 수억만 년 전부터 보살펴 왔다. 그러나 곰팡이 균류 네트워크는 1997년에서야 발견된다. 협력과 공생의 가치가 땅을 뚫고 지상까지 전파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온난화로 이제 묻혀있어야 할 것들이 떠오르고 있다. 또 다른 거대한 변화이자 도전이다. 얼어붙은 땅 아래 수천 년 전 묻혀 있었던 순록 사체에선 살상무기인 탄저균 포자가 방출되고, 그린란드 북서부에선 50년 전 만년설 아래 봉인했던 냉전 시대 미군 미사일 기지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곳엔 수십만 갤런의 유독성 화학물질이 묻혀 있었다. 지구 곳곳의, 잠자는 거인의 어두운 힘이 깨어나고 있는 것.
저자가 찾은 핀란드 남서부 올킬루오토 섬에선 고준위 핵폐기물을 봉인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인류가 지하에 만든 가장 거대한 무덤 속 경고문은 이랬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위험물질로부터 미래 세대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이곳을 땅속에서 온전하게 유지하기를 강력히 권합니다.’ 하지만 우라늄의 반감기는 44억 6,000만년. 그 사이 저 문구들은 사막의 바람에, 대기의 습기에 날아가고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경고문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 대한 장례 미사문이 되지 않을까. 저자는 땅 밑까지 헤집어 놓는 인간의 탐욕과 오만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이제 우리는 수평적이고 평면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심원의 시간(deep time)을 사고해야 할 때다. 그건 우리의 현재를 외면하는 핑계가 아니라, 현재를 재구성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또 자신을 과거와 미래의 수백만 년을 잇는 유산으로 보는 동시에 인류 이후의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갈 존재에게 무엇을 남길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 공포에 긴 장마까지. 땅 위의 삶이 퍽퍽한 요즘, 아득하고 낯선 지하 공간에는 또 다른 세계가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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