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 전 동의했다고 아직도 방송ㆍ책에 등장
사생활ㆍ돈문제 등 과도한 정보까지 '적나라'
액정표시장치(LCD)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불치병을 얻은 산업재해 피해자들의 투병기가 당사자 동의도 없이 방송이나 책에 인용되면서, 피해자의 아픔이 무분별하게 들춰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산재의 심각성을 알리기보다, 피해자 개인사를 지나치게 자세히 소개하는 식으로 상처를 키운다는 비판이 크다.
1997년부터 3년간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근무하다 시신경척수염으로 시각장애를 얻은 김미선(39)씨는 2000년대 초반 한 직업병 피해자 모임에 자신이 얻은 장애와 질병 얘기를 털어놓았다. 김씨는 당시 언론사 인터뷰에 응하고 책에 사연이 소개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김씨의 개인적 경험과 투병기는 그가 인터뷰를 중단한 2017년 이후에도 동의 없이 방송이나 책에 활용됐다. 한 언론사의 삼성전자 직업병 소송 기획에 사연이 등장하는가 하면, 유명 변호사 A씨가 맡아 진행하는 한 방송사 팟캐스트 연재에서는 아예 한 회차 전체에 김씨 사례가 활용됐다. 사적인 가족 관계나 가족의 열악한 금전 상황 등 김씨로선 피하고 싶은 얘기들도 적나라하게 소개됐다.
김씨는 "시각장애 때문에 스스로 기사를 찾아볼 수 없어 매번 다른 사람으로부터 뒤늦게 기사화 소식을 들어야 했다"며 "산재를 방치한 잘못을 알리는 취지가 아니라 나의 아픈 개인사를 들추는 식으로 변질돼 강한 불쾌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김씨는 "더 이상 사연을 활용하지 말라"는 얘기를 꺼내기 어려웠다고 한다. 김씨 사연을 수차례 인용한 A변호사가 김씨를 지원하는 단체에 속해 있던 탓이다. 김씨처럼 회사측과 합의하지 않은 피해자들이 기댈 곳은 지원단체가 유일한데, 지원단체에 싫은 소리를 했다가 받을 수 있는 불이익이 걱정돼 사연 중단 요청을 하지도 못했다. 김씨 사례를 동의 없이 활용한 A변호사는 "십수년 전 단체에 처음 동의를 밝힌 것이 곧 모든 동의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며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밝히는 순간부터 활용을 멈출 것"이라고 말했다.
공익을 이유로 산재 피해자의 개인적 사연이 필요 이상으로 들춰지는 것은 김씨만이 겪는 고통은 아니다. 2003년부터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은 이소정(36)씨 역시 자기 이야기가 A변호사를 포함한 다수의 글에 동의 없이 인용되는 경험을 했다. 지난해 이씨는 사연을 동의 없이 쓴 한 교수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1심에서 승소했다. 이씨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한 글들이 세상을 떠돌고 있다"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개별 사례마다 사용에 있어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씨 승소를 이끈 백상현 법무법인 해율 변호사는 "인터넷 발달로 피해의 무분별한 인용은 종전과 비교할 수 없는 피해를 준다"며 "(자기 개인정보의 영구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잊혀질 권리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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