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은 빚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중?
식당은 음악소리까지 줄여가며 조심조심?
면세점 "올해 장사는 이대로 끝났다"
하반기 직장 잃을까 불안해하는 승무원?
자동차에서 철강으로 위기 확산? 도미노
“50년 동안 사업하면서 소위 ‘깡통’을 세 번 차고도 재기했는데, 이번 위기는 정말 심각하네요. 빚으로 버티는 주변 기업들을 보면, 근근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 게 다행인가 싶어요.”
지난달 30일 인천에서 만난 양변기·세면대 부속품 제조업체 대표인 A씨의 낮은 목소리에선 기운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공장 가동률은 평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데다, 생산직 근로자들은 수개월째 주4일만 나오고 있다. 1979년 석유파동에서부터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등 3번의 위기 속에서도 매번 오뚝이처럼 일어섰지만 이번 만큼은 절망적이란 게 그의 푸념섞인 한탄이다. 산전수전을 모두 겪어온 A대표도 도무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를 뚫고 나갈 재간이 없다고 했다. 주문량이 3분의 1로 줄어든 협력업체 대표들이 돈 빌리러 다니는 걸 보며 A씨는 “기업들이 빚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는 게 실감 난다”고 씁쓸해했다.
산업현장이 코로나19 장기화 여파에 줄초상 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중소기업뿐 아니라 외식 면세 여행 항공 자동차 등 실물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던 산업들이 코로나19의 긴 터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이다. 산업현장은 성한 곳이 없는데, 청와대에선 현실과는 동떨어진 ‘경제선방론’을 들고 나오면서 원성만 높아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2분기 우리 경제에 대해 “기적 같은 선방이었다”고 평가했지만 기업과 상인들은 “앉아서 숫자만 보는 사람들이 뭘 알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악으로 버티고 있는데..."
최근 청와대와 정부는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가 상반기에 선방했고, 하반기에는 나아질 것이란 낙관적 전망을 잇따라 내놓았다. 몇몇 수치만 보면 아예 빗나간 분석은 아니다. 올해 우리나라 2분기 경제성장률은 1분기 대비 -3.3%를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성장 후퇴 폭보다 작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월별 수출은 4~6월 연속 작년 동기 대비 두 자릿수 감소세를 이어가다 7월 들어 한 자릿수로 감소 폭이 줄었다. 현재 경기 상황을 보여주는 통계청의 경기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4개월 연속 내리막길을 걸은 이후 6월 반등했다.
하지만 -3.3%는 과거 금융위기(2008년 4분기) 때의 -3.28%보다 낮은 성장률이다. 수출은 감소율이 둔화했을 뿐 여전히 마이너스다. 반짝 반등한 경기지수는 하반기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언제 다시 곤두박질칠 지 장담할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산업현장의 체감 경기다. 각종 지수에 드러나지 않는 실물경제의 어려움을 외면한 청와대와 정부의 장밋빛 전망에 기업과 상인들 사이에선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솔직히 청와대가 좋은 수치만 보고 말하는 것 아니냐”고 볼멘소리가 나온다.
현주소는 외식업계에서부터 확인된다. 서울 중구 명동에서 외식매장을 운영하는 B씨는 7월 매출 집계를 앞두고 걱정부터 앞선다고 했다. 몇 달째 매출이 전년의 30~40%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브레이크 타임(오후 3~5시)까지 만들어 인건비를 줄였지만 직원들은 무급휴직을 보내야 했다. B씨는 “유통업계에 15년째 몸담고 있는데, 이렇게 어려운 상황은 처음이다”라고 토로했다.
외식업계의 고통지수는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외식산업연구원이 지난 4월 외식업체 6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업체의 80.8%에서 고객 수가 감소했다. 35.2%는 직원 수를 줄였다. 상반기 서울에서만 식품위생업소 4,219곳이 문을 닫았다. 한 외식업체 관계자는 “요즘 외식 브랜드 매장들은 음악 소리까지 줄여가며 고객 모으기에 안간힘”이라고 전했다. 음악이 크면 말이 들리지 않아 서로 가까이 가게 되니 고객들이 매장을 외면할까 걱정해서다. 이 관계자는 “오죽하면 이런 것마저 조심하겠나”라며 “악으로 버티고 있는데 경제 선방이 웬 말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지난 5월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된 뒤 잠시 활기를 찾았던 소상공인들의 표정도 다시 굳어지고 있다. 지급 한 달째를 넘은 6월부터 손님 발길이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경기동향조사에 따르면 6월 전통시장의 체감경기지수(BSI)는 79.2로, 전 달보다 30.0포인트 급락했다. 코로나19 재확산 우려가 커진 데다 재난지원금 효과가 소진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반기는 또 다른 긴 터널
지쳐가는 건 면세점 업계도 마찬가지다. 업계에선 “올해 장사는 끝난 것 같다”며 하반기 기대마저 접는 분위기다. 한 면세점 판매직원은 “마이너스 매출에 문을 열어도 온종일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지난 4월 국내 면세점 매출은 1조원선이 무너졌다. 6월 매출도 작년 같은 달과 비교하면 43%나 떨어졌다. 면세점 매출의 80%는 외국인에게서 나오는데, 하늘길이 막혀 있는 한 경영 정상화는 먼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따이공(代工·중국 보따리상)이 조금씩 늘고 있기는 하지만, 입국 후 14일간 자가격리해도 남는 장사라고 판단하는 일부 대형 보따리상 위주라 매출 회복은 내년에도 기약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언제 다시 비행할 수 있을까’ 하고 막연히 기다렸던 항공업계 역시 한숨만 늘어가는 분위기다. 이스타항공 승무원 C씨는 회사 인수합병(M&A)만 마무리되면 다시 일할 수 있을 거란 희망고문으로 상반기를 버텼다. “3월 말부터 유니폼을 한 번도 입지 못했다”는 C씨는 “몇 달간 월급도 못 받았는데, 회사가 파산하고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얘기가 들린다”며 불안해했다. 9월부터 정부의 고용유지지원금이 중단되면 항공업계 근무자 총 3만여명 중 절반 가량이 실직할 거라는 전망마저 나온다. 정부와 청와대가 경기 회복을 기대한다는 하반기가 이들에겐 또 다른 긴 터널의 시작인 셈이다.
휴가철 국내 여행 수요가 늘면서 한편에선 관련 업계의 실적 회복을 점치는 눈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여행사들 매출 중 국내 여행상품 비중은 3% 미만이고, 수익률은 1%에도 못 미친다. 한 여행사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대중교통이 잘 발달돼 있고 요금도 저렴해 여행상품 수요가 많지 않다”며 “국내 여행을 상품화하고는 있지만 수익을 기대하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호텔업계 역시 하반기가 어둡다. 프리미엄 호텔 관계자는 “우리 호텔을 먹여 살리는 건 비즈니스 수요인데, 해외 입국이 막히고 내국인도 출장을 자제하면서 방 100개 중 90개가 비어 있다”고 전했다.
"문 닫는 기업 속출할 지도"
경제를 떠받쳐온 자동차 업체들도 여전히 허덕이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상반기 2조원대 흑자를 기록했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5.9% 감소한 수치다. 쌍용차는 14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올 하반기에는 내수 -5%, 해외 -30% 이상 침체가 예상돼 연간 판매 700만대 붕괴도 우려된다. 불황 타개책인 신차 출시마저 코로나19 여파로 일정이 줄줄이 밀리고 있다.
부품업체는 더 힘들다. 한국자동차산업연합회에 따르면 올해 국내 자동차부품 기업 평균 손실액이 176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출 물량이 절반 가량 줄었고, 대금 수령이 늦어지면서 유동성 위기도 커졌다. 자동차 공조기와 전장부품을 생산하는 D업체는 9월까지 필요한 유동성 중 40%도 채 확보하지 못했는데, 은행에서 대출조차 안 된다. D업체 관계자는 “자금 조달이 너무 어렵다”며 “상반기엔 그나마 1분기에 벌어둔 돈으로 버텼지만, 하반기엔 코로나19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문 닫는 기업들이 속출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자동차 업계의 어려움은 이미 철강업계로 옮겨갔다. 포스코가 2분기에 사상 첫 분기 적자를 기록하자 협력업체들 사이에선 “굶어 죽게 생겼다”는 우려가 확산됐다. 포스코 철강제품을 가공해 건설사에 납품하는 협력업체 관계자는 “코로나19로 대기업 공장 건설이 중단돼 4만톤 이상의 철근과 형강이 갈 곳을 잃었다”며 “이런 상황이 더 지속되면 업계가 전멸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산업계에선 정부가 일부 숫자에 근거해 낙관적 전망을 되풀이하기보다 코로나19와 미중 갈등 등 대내외 요인에 따른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며 피해 업계 지원을 지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코로나19는 세계가 함께 겪는 위기인 만큼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장기적으로 더 아플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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