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가 다녀갔네. 그저께 조금 늦게 나왔더니 큰 놈 하나 작은 놈 둘이 여기로 빠져나와 자네 텃밭 쪽으로 달아나더라고. 몇 년간 안 오더니 걱정이야.” 농막에 나갔더니 이웃 농장 주인이 푸념을 한다. 놈들이 한번 맛을 들이면 다시 찾기가 십상이란다. 이곳 산기슭에 작은 텃밭을 장만한 지 5년, 겨울을 빼면 거의 매주 한 번씩 드나들어도 멧돼지 피해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긴 깊은 산골이니 그게 더 신기한 일이다. 도심에 나타나는 짐승이 한적한 산중을 피하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멧돼지 가족은 두 주 후 다시 다녀갔다. 첫 방문 때는 옥수수 10여 대를 분질러 놓더니(어린 새끼들이 쉽게 먹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이번에는 고구마 밭을 온통 쑥밭으로 만들어놓고 떠났다. 철망 울타리 반대편에 사람이 드나드는 작은 틈이 있는데 옥수수 밭에서 놀다 우연히 입구를 찾아낸 모양이다. 구근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애써 키워놓은 참나리 뿌리까지 몽땅 파헤쳐 놓았다.
사실, 사람이 다치지 않는다면야 크게 억울할 일은 아니다. 텃밭이야 애초에 수확이 아니라 운동과 소일거리를 겸해 벌인 일이 아닌가. 땅이, 바람이 허락하면 고추 조금, 호박 조금 얻어 된장찌개도 끓이고 조림도 만들고 전 몇 개 부쳐 먹으면 그만이다.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가난에 떠밀려 어린 새끼들까지 이끌고 감행한 위태로운 나들이였다. 멧돼지 가족은 그렇게 남의 집 곳간을 기웃거렸건만 옥수수는 씨알이 영글지 않고 고구마도 잔뿌리가 고작이다.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한 구걸치고는 수확이 옹색하기만 하다. 저렇게 험악하게 파헤친 것도 절망과 분노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리라.
애초에 인간이 아니라면 산에서 내려올 이유도 없었다. 인간들은 권력과 자본과 트랙터를 앞세워 산을 허물어 별장을 짓고 대규모 고랭지 농장을 만들었다. 개발과 간벌을 이유로 터전과 먹거리를 빼앗아갔다. 이곳에 온 이후, 주변에 벌써 작은 동산 두 개를 깎아 팬션촌을 만들지 않았던가. 보따리 빼앗기고 뺨까지 맞은 심정이겠지? 자기들이 내몰아 놓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총질을 해대니 말이다.
이웃에서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겠다며 울타리 여기저기 말뚝에 폐기름을 발라 박아 넣고 있다. 나도 잠시 고민하다가 철사를 가져와 멧돼지들이 드나든 틈을 막기로 한다. 결실을 보기도 전에 이런 식으로 드나들면 서로에게 위험만 더할 뿐 멧돼지 가족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 멧돼지가 좋아한다는 돼지감자라도 심어둘까 하다가 그 역시 사람이 다칠까봐 포기하고 만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어린 자식들을 업고 끌고 내 집을 두드린 가난한 우리들의 어머니, 그 가족을 외면하는 마음이 모질기만 하다. 나는 주섬주섬 고구마 뿌리들을 거두고 줄기를 정리해 본다. 비록 늦기는 했어도 정성껏 이랑을 짓고 갈무리하면 작은 결실이라도 맺지 않을까?
똑같이 환경의 피해자이건만 우리는 그물에 걸려 죽은 밍크고래에 분노하면서도 멧돼지 가족의 총살에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만다. 고래가 상징적이라면 멧돼지는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래를 도우면 영웅이 되지만 멧돼지를 도우려는 순간 책임이 따르고 마니까. 내게, 우리에게 손해가 되니까. 미안하구나, 배고픈 성가족이여. 말만 번드르르할 뿐 너희를 도울 방법이 없구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