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덩후이 전 대만 총통이 2015년 7월 일본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연설을 마친 후 손을 흔들고 있다. 도쿄=AP 뉴시스
대만의 민주주의 체제 전환을 이끌어 '미스터 민주주의'로 불렸던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이 30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리 전 총통은 국민당 일당 독재를 끝내고 다당제와 총통 직선제를 도입해 대만 민주화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중국과 대만이 별개 국가라는 주장으로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이들로부터는 '대만의 아버지'로 불리는 반면 중국으로부터는 '대만 독립세력의 수괴'로 비난받았다.
중앙통신사 등 대만 매체들은 이날 오후 7시24분(현지시간) 타이베이 롱민쭝(榮民總)병원에서 리 전 총통이 숨졌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그는 지난 2월 우유를 잘못 삼키는 바람에 폐렴 증세를 보여 그간 입원치료를 받아 왔다. 이전까지도 고령인데다 장기간 건강이 좋지 않았던 리 전 총통은 최근 들어 병세가 더 악화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대만 ‘본성인’ 출신의 첫 대만 총통
일제 강점기인 1923년 현재의 대만 신베이의 경찰관 집안에서 태어난 리 전 총통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가 나고야에서 종전을 맞았다.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주립대와 코넬대에서 유학한 뒤 대만에 돌아와 학계와 정부에서 농업경제 전문가로 일하다 장징궈(蔣經國ㆍ1906∼1988) 전 총통에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장징궈는 1972년 행정원장 재직 당시 리 전 총통을 장관급인 국무위원으로 발탁했고, 부친 장제스(蔣介石ㆍ1887∼1975)에 이어 2대째 총통에 올라 세습 통치를 하면서는 그를 타이베이 시장과 타이완성 주석, 부통령에 잇따라 앉히면서 사실상의 후계자로 키웠다. 리 전 총통은 1988년 1월 장징궈가 사망하자 직무 승계를 거쳐 제7대 총통에 올랐다. 중국 본토 출신이 아닌 대만 출신으로는 첫 총통이었다.
국민당 독재 마감… 양안관계 개선 초석
리 전 총통은 집권 후 민주주의 체제로의 과감한 전환에 나섰다. 중국 본토 출신이 주축이던 국민당 기득권 세력과 맞서면서 다당제 도입,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 총통 직선제 등을 차례로 관철시켰다. 또 ‘반란세력 토벌을 위한 국가동원 시기’도 공식적으로 종료시켰다. 1996년에는 첫 직선제 총통에 당선됐다.
그는 대만의 민주화와 함께 양안(중국과 대만)관계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1992년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바탕으로 양안관계의 발전을 추구해나간다는 '92합의'가 대표적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포탄을 주고받던 양안은 점진적인 3통(통상ㆍ통항ㆍ통우) 확대를 통해 1990년대 들어 교류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면서도 리 전 총통은 1989년 중국의 톈안먼 민주화시위 유혈진압에 대해선 긴급 성명을 통해 강력 비난하는 결기를 보였다.
말년에 탈중국 성향 표출… '친일' 꼬리표도
리 전 총리는 재임 말기에 국민당 출신이면서도 중국과 대만이 별개의 국가라는 양국론(兩國論)으로 양안관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후임 총통을 뽑는 2000년 대선에선 사실상 야당인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후보를 사실상 지지했고, 퇴임 후 탈중국 성향을 적극 표출하다 결국 출당됐다. 독립 성향의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을 정계로 이끈 것도 리 전 총통이었다.
그는 '친일' 꼬리표가 붙을 만큼 일본에 호의적이었다. 말년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정도였다.
베이징=김광수 특파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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