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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이 '인생 은인'이라고 한 심재명 대표

입력
2020.07.30 17:39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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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심재명 명필름 대표

편집자주

영화도 사람의 일입니다. 참여한 감독, 배우, 제작자들의 성격이 반영됩니다. <영화로운 사람> 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가 만나 본 국내외 유명 영화인들의 삶의 자세, 성격, 인간관계 등을 통해 우리가 잘 아는 영화의 면면을 되돌아봅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신진 영화인력들과 함께 한국사회에 대해 메시지를 던지는, 완성도 높은 영화들을 선보여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신진 영화인력들과 함께 한국사회에 대해 메시지를 던지는, 완성도 높은 영화들을 선보여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젊은 감독은 떠오르는 흥행술사였다. 관객 500만명이 넘는 영화를 잇달아 선보이며 주목 받았다. 투자배급사와 제작사들이 함께 일하고 싶어 기회를 엿보던 신예였다. 젊은 감독과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우연찮게 마련된 그 겨울 술자리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감독은 사랑 고백하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표님 저랑 작품 한번 같이 해요.” 굴러들어온 복에 표정관리하기 바쁠 만한 상황. 심 대표의 답변은 의외였다. “감독님, 죄송하지만 저는 흥행 잘 하고 계시는 분하고는 일 안해요. 다른 분과 일하셔도 잘 하실 텐데요. 감독님이 싫어서 그런 거 아니니 오해는 마세요.” 8년 전 있었던 일이다.

젊은 감독은 당황했는데, 심 대표의 영화 이력을 돌아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심 대표는 유명 감독과 함께 호흡을 맞춘 경우가 많지 않다. 많은 감독들이 명필름에서 영화를 만들며 흥행에 성공해 인지도를 얻었다. 박찬욱 감독이 대표적이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 이전까지 박 감독은 잠재력만 지닌 무명이었다. ‘달은… 해가 꾸는 꿈’(1992)과 ‘3인조’(1997)가 흥행에 잇달아 실패하며 30대 중후반에 연출 이력이 일찌감치 끊길 위기에 처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관객 580만명을 불러모으며 박 감독은 충무로의 큰 별로 빠르게 떠올랐다. 이후 ‘올드보이’(2004)로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는 등 그의 영화 행보는 한국을 넘어 세계로 향했다. ‘스토커’(2013)로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박 감독은 사석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심 대표를 “인생의 은인”이라고 표현한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박 감독의 최고 흥행 영화다.

여성 영화감독의 맏언니 역할을 하는 임순례 감독도 심 대표와 함께 일하며 영화 인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첫 협업한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이 404만명을 모으며 임 감독은 흥행 감독이 됐다. 이후 ‘남쪽으로 튀어’(2012)와 ‘제보자’(2014), ‘리틀 포레스트’ 등을 연출한 임 감독에게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여전히 ‘생애 최고흥행의 순간’으로 남아있다.

1990년대 ‘남부군’(1990)과 ‘하얀 전쟁’(1992) 등을 성공시킨 이후 슬럼프에 빠져 있던 정지영 감독이 재기할 수 있었던 영화 ‘부러진 화살’(2012) 역시 명필름과의 협업으로 세상에 나왔다. ‘YMCA야구단’(2002)과 ‘스카우트’(2007)의 김현석 감독은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과 ‘아이 캔 스피크’(2017)를 명필름과 만들며 재활했다. 데뷔작 ‘불신지옥’(2009)으로 흥행엔 실패했으나 연출력을 인정 받은 이용주 감독은 명필름과 ‘건축학개론’(2012)을 만들며 충무로 기대주로 부상했다. 심 대표를 ‘충무로 재활공장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심 대표는 흥행에선 별 재미를 못 봤으나 잠재력 있는 인재와 고집스레 협업해왔다. 이런 심 대표의 작업 방식은 영화 인력 양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심 대표는 남편인 이은 명필름 공동대표와 함께 2014년 경기 파주시 파주출판단지에 명필름아트센터를 열었다. 영화관과 전시시설 등을 갖춘 이곳은 작은 영화학교 명필름랩을 품고 있다. 2015년부터 10명 미만으로 매년 영화 인재를 길러내고 있다. 실습 위주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은 매년 장편영화 1편 이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의 성과물이 지난 5월 개봉한 ‘국도극장’이다. 신인 감독이 연출한 저예산영화들이다 보니 돈이 되지는 않는다. 영화계에서도 부동산 투자가 최고 재테크로 꼽힌다. 유명 배우는 물론 영화로 잭팟을 터트린 감독과 제작자는 서울 요지에 빌딩을 짓거나 건물을 구입하곤 한다. 영화로 번 돈 대부분을 영화 쪽에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은 충무로에서 심 대표와 이 대표의 선택은 도드라진다.

‘충무로 미다스의 손’ 같은 심 대표는 영화계 성폭력 퇴출과 여성 영화인 권익 신장을 위해 앞장서고 있기도 하다. ‘미투’ 운동이 활발하던 2018년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을 설립해 임순례 감독이랑 공동 이사장을 맡고 있다.

예전만큼 상업영화를 자주 내놓진 못하지만 명필름은 여전히 충무로 품질보증마크로 통한다. 심 대표가 영화계에 이룬 성취는 많으나 품질 좋은 영화들을 더 자주 내놓았으면 좋겠다. 영화산업 덩치는 명필름이 설립된 1995년보다 커졌음에도 영화다운 영화에 대한 목마름은 더 큰 요즘이다. 심 대표의 '영화로운' 성과를 다시 기대해 본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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