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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분노

입력
2020.07.31 18:00
수정
2020.07.31 18:32
22면
0 0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미국 민주당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이 23일(현지시간) 워싱턴 의회에서 자신에게 욕설을 한 공화당 테드 요호 하원의원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연설을 하고 있다. 뉴시스.

미국 민주당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이 23일(현지시간) 워싱턴 의회에서 자신에게 욕설을 한 공화당 테드 요호 하원의원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연설을 하고 있다. 뉴시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분노는 인간 진화과정에서 비교적 초기에 만들어진 감정이다. 감정의 진화단계를 보면 공포와 불안이 가장 오래전에 형성됐고, 그다음 분노 죄책감이 생겨났으며, 이후 애정 우정 호감 등으로 다양해진다. 진화의 정점에 명예 도덕 행복 등이 자리 잡는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진화 초기 감정을 더 진화한 감정으로 제어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즉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된 분노를 아무런 여과 없이 쏟아낸다면 의식 있는 행동이라 볼 수 없다.

□ 이 기준에서 보면 요즘 정치권에서 의식 없는 언행이 점점 늘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이 “1가구 2주택자는 국민의 행복권을 빼앗은 도둑들”이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상대에게 최대한 상처를 주려 지략을 동원하는 ‘의식적인 의식 없는 언행’도 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뒤늦게나마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침묵한 것에 대해 “통절히 반성한다”고 하자, 이를 ‘악어의 눈물 역겹다’고 비난한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글이 그 범주에 들 것이다.

□ 분노는 가장 다루기 힘든 감정이다. 억제만 하면 자신의 건강을 해친다. 그렇다고 그대로 분출하면 도모하는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바람직한 해결 방법은 분노를 일으킨 상대를 용서하거나, 자신의 분노 이유를 상대방과 관계를 최대한 해치지 않도록 정중하고 정확하게 전달해 공감을 얻는 것뿐이다. 머리로 안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 최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미 하원의원은 자신에게 비속어를 내뱉은 남성 의원이 “나도 딸들이 있다”고 변명하자, 의회 연단에 섰다. 그는 “비속어를 자주 들으며 성장했기에(남성들은 그런 수준이므로) 별 신경 쓰지 않았다”고 연설을 시작한다. 이어 “하지만 자신의 형편없는 행동을 변명하려 딸을 방패막이 삼는 것은 참을 수 없다”며 “나도 내 부모님이 나를 남성의 모욕을 그냥 넘기도록 키우지 않았다는 걸 보여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 “권력을 가진 남성이 여성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준 데 대해 그 의원에 감사한다”고 매듭짓는다. 이런 품위 있는 분노를 우리 정치권에서도 보고 싶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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