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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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

입력
2020.07.30 15:08
수정
2020.07.3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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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
백승주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게티이미지뱅크



후라이드 반 양념 반은 아니고, 학자로서 질투심 반 부러움 반에, 치킨무 정도의 절망감을 덤으로 느끼며 한 강연 동영상을 봤다. MIT 교수 뎁 로이의 TED 강연 ‘단어의 탄생’이다. 뎁 로이는 병원에서 태어난 아들이 집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3년간 자신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째로 녹화한 후, 아들의 언어 습득 과정을 추적했다. 언어 습득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라면 한 번쯤 꿈꾸었겠지만, 여러 이유로 모두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을 해낸 것이다.

가가. 구가. 와다. 와덜. 워터. 뎁 로이는 마술사처럼 반년의 시간을 40초로 압축해 아들이 ‘물’이란 단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연구팀은 간단하게 인간에게서 특정한 단어가 탄생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더 부러운 것은 그의 분석틀이 시간의 축만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축도 재현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어떤 장소와 상황에서 누가 아들에게 ‘물’이라고 말하고, 아들은 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여 시각화하면 말들의 지형이 생겨난다. 물이란 말은 부엌에서 높은 봉우리를 이루고, 안녕이라는 말은 현관에서 언덕을 이루는 식이다. 아이들이 자라는 곳은 현관, 거실, 부엌이라는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다. 아이들은 이 공간 안에 구축되는 보이지 않는 언어 풍경 속에서 성장한다. 부엌에서는 반찬을 골고루 먹으라는 말이, 거실에서는 뛰어다니지 말라는 말이, 책상에서는 다리 떨지 말고 잘 앉아 있으라는 말이 쌓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말들은 공간과 얽히며 인간의 신체와 행동을 규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특정 공간의 언어 풍경 속에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허용되는 (말)행위와 허용되지 않는 (말)행위가 규정되어 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과 교섭하면서 지형을 만들어낸다. 말을 가르치고 배울 때 양육자와 아이 사이에는 무의식적인 피드백 고리가 구축되는데, 말들의 풍경은 이 고리의 순환 속에서 탄생한다. 이를테면 말들의 풍경을 만든다는 것은 ‘말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 그 자체’인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인들이 빚어내고 있는 말들의 지형은 어떤 모습인가? 한국인들은 어떤 말들을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가? 뎁 로이처럼 분석하지 않아도 한국 사회에서 거대한 산맥과 광대한 평야를 이루고 있는 것은 혐오와 차별의 언어임을 알 수 있다. 증거?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을 보라, 죽음을 택한 정치인의 성폭력 피해자에게 죽음의 책임을 묻고 2차 가해를 하는 행태를 보라, 차별을 법으로 금지하자는 움직임을 신의 이름으로 저주하는 모습을 보라.

이것이, 한국의 ‘교육’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거리낌 없이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가르치고 배운다. 이 교육 속에서 소년들은 여성을 성적 욕망을 위한 도구라고 배운다. 이 교육 속에서 상급자는 위력으로 하급자를 유린할 수 있다고 배운다.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는 이 교육을 통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난민들에게 말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요컨대, 혐오와 차별의 산맥 사이, 깊은 계곡에 갇힌 이들의 목소리는 지층 밑에 묻혀서 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들의 말은 지형을 이루고 풍경을 만들 권리가 없다.

한국 사회의 언어 풍경은 워낙 강고해서 산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의 지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풍경은 허물고 부술 수 있는 인공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제 말해야 한다. 피해자와 연대한다고. 차별에 반대한다고. 그래야 지형을 이룰 수 있고, 그래야 이 지옥도와 같은 말들의 풍경을 바꿀 수 있다.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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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의 언어의 서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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