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수 같은 인물들이 뒤엉키는데 위태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야생의 호랑이와 맞닥뜨린 듯한 긴장감보다는 철창에 갇혀 사육된 야수를 지켜보는 익숙함이랄까. 내달 5일 개봉하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그런 영화다.
갱스터 누아르 ‘신세계’의 황정민과 이정재가 7년 만에 다시 만났다는 점만 해도 기대감을 부풀리는 이 영화는, 납치된 가족을 구출해내기 위해 악당이 자기보다 더 나쁜 악당의 추격을 피해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의 액션 스릴러다.
주인공은 한때 국정원 요원이었으나 조국을 떠나 청부살인업자로 살아가는 인남(황정민). 마지막 임무 '재일조선인 야쿠자 살해'를 끝낸 뒤 파나마로 떠나기 직전, 태국 방콕에 살던 옛 여자친구 영주(최희서)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주가 홀로 키우던 딸 유민이 납치됐다는 말에 인남은 방콕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 인남 뒤에는 야쿠자의 동생 레이(이정재)가 형의 복수를 위해 따라 붙는다.
영화의 초점은 주먹 하나로 조폭 10명쯤은 거뜬히 쓰러뜨릴 수 있는 두 인간병기 간의 혈투다. 카리스마 넘치는 두 야수의 대결을 중심에 두다보니 대사보다 액션의 비중이 훨씬 크다. 태국이란 이국적인 풍경 아래 주먹과 주먹이 맞붙는 육탄전에서부터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중무장한 화력전까지, 아드레날린 넘치는 액션이 이어진다. 잔인한 묘사가 많지만 대부분 직접 보여주지는 않아 관람 등급이 15세 이상이다. 황정민, 이정재 두 배우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도 좋지만, 자칫 삭막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박정민의 트랜스젠더 연기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스타일리시한 액션 시퀀스와 불꽃 튀는 카리스마 대결이 관객을 사로잡는 데 반해 플롯이 주는 재미는 덜하다. ‘존 윅’ 같은 액션 영화처럼 액션 시퀀스들을 연결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설명을 제외한 세부적인 이야기는 대부분 압축되거나 생략된다. 방콕의 범죄조직은 왜 그렇게도 허술한지, 오랫동안 형과 연락을 끊고 살았던 레이가 왜 갑자기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가며 복수를 하려 드는지 등에 대해선 적당한 상상력을 동원하거나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
영화의 속도는 빠르다. 인남이 도쿄에서 인천 찍고 방콕으로 건너간 이후, 주먹다짐과 총격전과 추격 장면이 끝없이 이어지며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질주는, 비유하자면 울퉁불퉁한 오프로드가 아니라 매끈한 고속도로 위에서 이뤄진다. 속도는 빠른데 스릴은 덜하다. 장르적 관습에 의존해 안전한 길만 가다 보니 예상 밖의 전개나 반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빵빵 시원하게 터지는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은 들지 않는다.
여기에다 황정민ㆍ이정재의 ‘신세계’를 연상시키는 엘리베이터 액션 장면처럼 기시감이 느껴지는 부분도 적지 않다. 범죄 조직에게 납치된 가족이나 가족 같은 이를 구해내기 위해 온몸을 불사른다는 점에선 ‘테이큰’ '아저씨' 같은 영화와 닮았고, 무자비한 추격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얼마 전 개봉한 ‘사냥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제목은 기독교의 주기도문 마지막 구절에서 가져왔다. 데뷔작 '오피스'로 주목 받은 뒤 두 번째 영화를 연출한 홍원찬 감독은 "원죄를 지닌 인물이 다른 사람을 구하게 되면서 본인도 구원받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구원에 이르려면 자신의 죄에 대한 뼈아픈 자각이나 희생, 속죄가 뒤따라야 하는 법. 그러나 인남에겐 목숨을 바쳐 딸을 구하겠다는 일념밖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 많은 게 생략되다 보니 인남과 유민 간 교감도 당혹스러울 만큼 갑작스럽다. 거창한 주제가 스타일에 압도당한 탓이다. 황정민ㆍ이정재가 만났으나, 다만 스타일에서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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