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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 위에 뛰는 말...중국 여행의 상징이 되다

입력
2020.08.0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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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간쑤 남부와 칭하이 동부 ① 란저우와 병령사석굴

편집자주

중국 서부의 간쑤성과 칭하이성에는 실크로드인 하서주랑(河西走廊)이 막히면 우회하는 길이 있다. 당나라 시대를 전후해 티베트 문화가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다. 란저우를 출발해 병령사석굴을 지나 샤허, 퉁런, 황중에 위치한 티베트 사원과 칭하이성의 시닝과 청해호, 먼위엔을 거쳐 해발 4,000m에 이르는 치렌산 넘어 다시 간쑤성의 장예에 이르는 노정을 4회에 나눠 연재한다.

간쑤와 청하이 발품 동선.

간쑤와 청하이 발품 동선.

간저우(甘州)와 쑤저우(肅州)가 간쑤성이 됐다. 두 도시는 지금의 장예(張掖)와 주췐(酒泉)이다. 실크로드인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다. 간쑤성은 이탈리아 반도처럼 길게 뻗었다. 수도는 동쪽에 위치한 란저우(蘭州)다. 기원전 86년 한나라 소제는 금성현이라 했다. 583년 수문제가 남쪽에 위치한 조란산의 방어 기능을 고려해 지명을 고쳤다. 란저우는 하서주랑을 지나 장안(長安)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리고 황하가 통과한다.

란저우를 흐르는 황토색 황하. ⓒ최종명

란저우를 흐르는 황토색 황하. ⓒ최종명


황하 강변에서 바라본 백탑산. ⓒ최종명

황하 강변에서 바라본 백탑산. ⓒ최종명


백탑산 오르는 케이블카 그림자가 붉은 황하에 비치고 있다. ⓒ최종명

백탑산 오르는 케이블카 그림자가 붉은 황하에 비치고 있다. ⓒ최종명

황하를 가로지르며 오르는 케이블카를 타고 백탑산(白塔山)에 오른다. 붉은 황토를 머금은 황하를 위에서 바라보니 남다르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후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백탑이 있다. 높이 17m로 아랫부분은 원통이며 윗부분은 8면 7층이다. 서하(西夏) 정복을 눈앞에 둔 칭기즈칸은 배후에 있는 티베트와 협력을 도모했다. 티베트를 통치하던 싸캬빠(薩迦派ㆍ티베트 불교 종파 중 하나로 보통 화교(花?)라 한다) 법왕은 회담에 응했고 승려를 파견했다. 불행하게도 승려가 란저우에 도착한 후 사망했다. 당시 란저우는 서하의 영토였다. 백탑은 서하를 멸망시킨 후 1226년 티베트 승려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탑이다. 보수를 거듭했다. 지금의 탑은 1715년 청나라 강희제 때 중건했다.

티베트 승려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란저우의 백탑. ⓒ최종명

티베트 승려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란저우의 백탑. ⓒ최종명


백탑산에서 내려다본 중산교. 황하제일교라고도 한다. ⓒ최종명

백탑산에서 내려다본 중산교. 황하제일교라고도 한다. ⓒ최종명


1942년 중산교로 개명한 란저우황하철교. ⓒ최종명

1942년 중산교로 개명한 란저우황하철교. ⓒ최종명

황하를 연결한 철교로 눈길을 돌린다. 황하제일교로 불리는 중산교(中山橋)가 한눈에 들어온다. 황하의 양쪽 강변을 안전하게 연결하는 철교다. 1909년 8월 독일 상인 자본이 설계하고 건설했다. 란저우황하철교(蘭州黃河鐵橋)로 불리다가 1942년 중산교로 개명했다. 쑨원에 대한 중국인의 예우다. (중산은 쑨원의 호다.) 건국 후 아치형 들보를 새로 설치하는 등 보수를 했다. 233.33m나 되는 철교가 100년이 지났어도 탄탄하다.

새보다 빠른 말이 있다...란저우 간쑤성박물관

간쑤성박물관의 실크로드문명 전시실에 있는 노선도. ⓒ최종명

간쑤성박물관의 실크로드문명 전시실에 있는 노선도. ⓒ최종명

란저우에 가면 간쑤성박물관을 꼭 찾는다. 중산교에서 이동하면 10분 걸린다. 신분증(여권)이 있으면 무료다. 너무 넓어 다 보려면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황하 유역의 신석기 및 청동기 유물은 채도(彩陶) 전시실에 무수히 많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의 고생물화석 전시실도 있다. 무엇보다 실크로드문명 전시가 볼만하다. 실크로드 유물 42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동분마(銅奔馬), 날아가는 새의 등을 밟고 질주하는 말이다. 얼마나 빨리 달리는 말인지 상상만으로 흥미롭다. 중국인은 고대부터 과장을 상징으로 다듬는 재주가 많았다. 1969년에 우웨이(武威)에 있는 레이타이(雷臺)에서 동한시대 무덤이 발굴됐다. 동분마는 이때 출토됐으며 1986년 국보급 문물로 선정됐다. 2002년에는 국가문물국이 해외 전시를 금지하는 유물 64건에 포함했다.

우웨이 레이타이의 동한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물, 동분마. ⓒ최종명

우웨이 레이타이의 동한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물, 동분마. ⓒ최종명


동분마를 본떠 만든 중국여유국의 엠블럼.

동분마를 본떠 만든 중국여유국의 엠블럼.

별명도 많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역사학자이자 문학가인 궈모뤄(郭沫若)가 명명한 마답비연(馬踏飛燕)이다. 밟힌 새의 생김새가 꼭 제비로 보이진 않았다. 전문가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봉황을 연상하면 마초용작(馬超龍雀), 날렵한 매로 느끼면 마습비준(馬襲飛?), 까마귀로 보이면 마답오아(馬踏烏鴉)로 부른다. 새보다 빨리 날아가려는 말의 활기찬 동작이 아름답다. 세 발은 공중에 떠 있고 뒷발에 등을 밟힌 새는 화들짝 놀라 뒤돌아본다. 발굽과 등의 접점과 순간을 보고 있으면 전율이 느껴진다. 인간의 창의성이 전해지는 감동을 멈추기 어렵다. 1985년 중국 국가여유국(國家旅遊局)은 동분마로 중국 여행을 상징하는 엠블럼을 만들었다.

우웨이 레이타이의 동한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동차마의장용대. ⓒ최종명

우웨이 레이타이의 동한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동차마의장용대. ⓒ최종명

동분마는 레이타이에서 동차마의장용대(銅車馬儀仗俑隊)와 함께 출토됐다. 병마용처럼 주민들이 우연히 발견했다. 창고에 한동안 보관했다가 발각됐다. 동분마를 부대의 선두에 위치한 영두마(領頭馬)로 봤다. 장(張)씨 장군 부부의 무덤에서 나온 의장대는 동분마를 포함해 모두 99점이다. 무사 17명, 마부 28명, 마차 14량, 소 1두, 말 39필이다. 동분마는 99점 중의 하나였다. 1971년 궈모뤄가 박물관을 찾았다. 의장대 맨 앞에 있는 말을 보더니 '마답비연'이라며 찬미했다. 동한시대 평범한 장군 무덤에서 나온 그저 그런 유물이 중국 최고의 국보로 되살아났다. 궈모뤄는 천리마를 알아본 춘추시대 인물인 백락(伯樂)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비로소 역사의 주인을 만난 셈이다.

간쑤성박물관이 소장한 보물인 서한 시대 견저평수인상. ⓒ최종명

간쑤성박물관이 소장한 보물인 서한 시대 견저평수인상. ⓒ최종명

박물관이 소장한 보물급 불상이나 도자기는 다른 박물관에도 많다. 눈길을 끄는 소품이 두 개 있다. 크기가 작아서 그렇지 가치가 낮다는 뜻이 아니다. 견저평수인상(絹底平繡人像)과 역사도(驛使圖)가 마음에 쏙 든다. 견직물에 직선으로 담백하게 자수를 놓은 견저평수인상은 서한시대 보물이다. 세로 길이가 겨우 7.3cm다. 우웨이 남쪽 모쭈이쯔(磨嘴子) 무덤에서 발굴됐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은 자수 선을 따라 따뜻한 감성을 드러내고 있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만든 손수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도. 요즘으로 치면 말을 탄 우편배달부다. ⓒ최종명

역사도. 요즘으로 치면 말을 탄 우편배달부다. ⓒ최종명

1970년대에 자위관(嘉?關)과 주췐(酒泉) 부근에서 위진(魏晉, 220~420)시대 무덤이 많이 발견됐다. 그림이 그려진 벽돌 즉, 도화전(圖??)으로 쌓는 무덤이 유행했던 듯하다. 동물이나 풍속을 그린 그림이 그야말로 예술이다. 수렵도(狩獵圖), 쌍타도(雙駝圖), 우경도(牛耕圖), 퇴량도(堆糧圖), 방응도(放鷹圖), 연거도(宴居圖) 등은 농경사회와 실크로드 문화를 담았다. 그런데 역사도(驛使圖)는 뜻밖이다. 벽돌 길이는 35cm이고 너비는 17cm, 두께는 5cm다. 미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그렸으며 파발마 몸체는 진홍색이다. 당시 우편배달부의 모습이다. 왼손에 문서를 들고 질풍처럼 달리고 있다. 이런 멋진 그림이 벽돌에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1982년 기념우표로 등장했고 중국 우정저축은행 카드의 배경 그림으로도 사용됐다.

깨알같고 웅장하고...명품 조각 박물관, 병령사석굴

황하 상류의 류자샤 수력발전소이자 유람선 출발지. ⓒ최종명

황하 상류의 류자샤 수력발전소이자 유람선 출발지. ⓒ최종명


류자샤에서 병령사석굴로 이동하는 쾌속정. ⓒ최종명

류자샤에서 병령사석굴로 이동하는 쾌속정. ⓒ최종명


병령사석굴 앞 부두에서 본 기암괴석과 협곡. ⓒ최종명

병령사석굴 앞 부두에서 본 기암괴석과 협곡. ⓒ최종명

란저우를 벗어나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융징현(永靖縣) 류자샤(劉家峽)까지 1시간 30분이 걸린다. 수력 발전을 위해 황하를 막아 거대한 댐이 생겼다. 댐을 지나 협곡으로 들어서면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을 만날 수 있다. 옛길을 따라가도 되지만 험난한데다 시간도 오래 걸린다. 댐이 생긴 후부터 배를 타면 접근이 쉽다. 쾌속정으로 1시간 걸린다. 기암괴석이 형형색색, 울퉁불퉁해 눈요깃거리가 많아 지루할 틈이 없다. 댐 상류로 계속 가다가 점점 좁아지는 협곡으로 들어서면 부두가 나타난다.

댐 수위 상승으로 다리는 사라지고 천하제일교 석각만 남아 있다. ⓒ최종명

댐 수위 상승으로 다리는 사라지고 천하제일교 석각만 남아 있다. ⓒ최종명


병령사석굴 지도. 다사구 도랑 서쪽 절벽에 조성됐다. ⓒ최종명

병령사석굴 지도. 다사구 도랑 서쪽 절벽에 조성됐다. ⓒ최종명

석굴은 적석산(積石山) 자락의 도랑인 다사구(大寺溝) 서쪽 절벽을 따라 조성됐다. 1600년 역사를 지녔다.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 걸복부가 세운 서진(西秦)이 420년에 처음 굴착했다. 예로부터 강족(羌族)의 거주지였다. 초기에는 강족 말로 귀굴(鬼窟)을 음역한 당술굴(唐述窟)이라 불렀다. 북위, 당나라, 송나라를 거치며 여러 이름으로 부르다가 명나라 영락제 때부터 병령사라 불렀다.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아들인 왕조였다. 십만미륵불주(十萬彌勒佛洲)를 뜻하는 티베트 말인 강파분랑(?巴?朗)을 그 어원으로 추측한다. '분랑(중국어 발음으로 번랑ㆍbenlang)'이 음역돼 병령이 됐다. 183개의 크고 작은 석굴과 불감에 694구의 조각상과 82구의 소조상, 912m²의 벽화가 있다. 지금도 황하 협곡의 험준한 산속이지만 실크로드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황하를 건너던 다리는 ‘천하제일교’라는 석각만 남기고 댐 수위가 높아지자 사라졌다.

병령사석굴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됐음을 알리는 기념석. ⓒ최종명

병령사석굴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됐음을 알리는 기념석. ⓒ최종명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유네스코 회의에서 실크로드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중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여러 갈림길 중에서 ‘장안(長安)에서 천산(天山)에 이르는 좁은 도로망’으로 특정했다. 장안은 지금의 시안이다. 천산은 2,500km에 이르는 산맥으로 중국 신장 북부와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걸쳐 있다. 3개국이 공동으로 신청한 이유다. 중국에선 허난, 산시, 간쑤, 신장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실크로드 유적이포함됐다.

단층 돌탑이 있는 병령사석굴의 제3굴. ⓒ최종명

단층 돌탑이 있는 병령사석굴의 제3굴. ⓒ최종명

왼쪽 길을 따라가면 석굴이 줄줄이 이어진다. 일일이 관찰하기에는 너무 많다. 유물로서 가치가 도드라진 몇 개라도 제대로 볼 요량이다. 제3굴에 이르니 사각형의 단층 돌탑이 나타난다. 다소 놀랍다. 높이 3.5m의 네모 반듯한 석굴에 2.23m의 탑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당나라 시대 유물은 초당, 중당, 성당, 만당으로 구분한다. 이 석굴은 성당(盛唐ㆍ713~766)시대에 만들었다. 탑 안에 불상이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자세히 보면 꼭대기에 작은 수미좌(須彌座)가 보인다. 불단 위에 꽃잎 문양이 펼쳐져 있고 안에 바리때가 거꾸로 놓였다. 인도의 불탑 양식이며 중국에서 유일무이하다. 석굴 벽화와 돌탑 표면은 명나라 시대에 다시 채색됐다. 탑 뒷면 아래에 ‘대명(大明)’과 ‘가정(嘉靖)’이 적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6세기 명나라 세종의 연호다.

제6굴의 부처와 벽화 천불과 나무. ⓒ최종명

제6굴의 부처와 벽화 천불과 나무. ⓒ최종명

제6굴의 첫인상은 여느 석굴과 비교해 평범해 보인다. 남북조시대 선비족 우문부가 세운 북주(北周ㆍ507~556)의 작품이다. 정면에 두 손을 맞잡은 선정인(禪定印)을 한 채 결가부좌 자세의 부처가 있다. 비범한 장면은 부처 뒤의 벽화에 있다. 손가락 정도 크기의 천불이 빼곡하다. 부처와 부처 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위아래와 옆으로 나무 한 그루씩 함께 그려져 있다. 나무가 부처를 사방에서 감싸는 듯한 형상이다. 깨알 같은 명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제11굴의 보리수 벽화와 제70굴의 십일면팔비관음상. ⓒ최종명

제11굴의 보리수 벽화와 제70굴의 십일면팔비관음상. ⓒ최종명

제11굴 벽화에 보리수가 그려져 있다. 왕오천축국전이 보관됐던 막고굴 제17굴 벽화에도 보리수 두 그루가 그려져 있다. 나무 생김새는 다르지만 모두 만당시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제70굴에는 당나라 석굴에 명나라 시대에 다시 세운 십일면팔비관음상(十一面八臂觀音)이 있다. 11개의 얼굴과 8개의 팔이 우아하면서도 균형 있는 몸매를 자랑한다. 이 역시 티베트 불교 소조에 자주 등장한다.

조그마한 불감마다 번호가 붙어 있다.

조그마한 불감마다 번호가 붙어 있다.


제64감의 부처, 보살, 천왕. ⓒ최종명

제64감의 부처, 보살, 천왕. ⓒ최종명

석굴은 아니지만 절벽에 만든 불감(佛龕)도 많다. 다닥다닥 붙은 불감마다 번호를 써 놓았다. 조각 전시관을 방불케 한다. 제64감은 부처와 보살 둘, 천왕 둘의 석조가 생동감이 넘친다. 불감에 ‘당의풍(唐儀鳳) 3년 형부시랑 장초금(張楚金)’이라는 비문이 있다. 의풍은 당나라 고종의 연호다. 678년은 티베트와 전쟁이 격렬했다.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뜻이 담겼다. 양쪽 천왕은 귀신을 발로 밟고 있는 형상이다. 지금은 해학이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간절했을까? 이런 모습은 석굴 조상(彫像)에 흔하게 등장한다.

제125감의 석가모니와 다보불이 나란히 앉은 모습. ⓒ최종명

제125감의 석가모니와 다보불이 나란히 앉은 모습. ⓒ최종명

제125감은 부드러운 아치형 불감에 현세불인 석가모니와 과거불인 다보불(多寶佛)이 나란하게 앉아 있다. 법화경 견보탑품(見寶塔品)의 기록을 재현했다. ‘다보불이 자리의 반을 석가모니에게 내주며 앉으시기를 청하였다. 석가모니는 결가부좌하고 다보불과 자리를 나누어 앉으셨다’는 내용이다.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북위(北魏ㆍ386~534)시대의 품격이다. 두 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불감 밖에 역사(力士) 둘이 문지기인 양 부조돼 있다.

병령사석굴에서 가장 거대한 제169굴. ⓒ최종명

병령사석굴에서 가장 거대한 제169굴. ⓒ최종명


제169굴 미륵대불의 거대한 손과 발. ⓒ최종명

제169굴 미륵대불의 거대한 손과 발. ⓒ최종명


제169굴은 천연 동굴에 만든 석굴이다. 바깥에 드러난 높이 27m의 미륵대불과 동굴 속 24개의 불감에 있는 조각 및 소조를 모두 포함한다. 공사 중이어서 올라가지 못해 아쉽다. 별도의 관람료를 받는 ‘특굴’로 지정돼 있다. 420년 서진시대에 석굴이 처음 굴착되면서부터 조성된 흔적인 제기도 있다. 병령사석굴의 명성은 이 동굴로부터 시작됐다. 미륵대불은 당나라 시대에 건축됐다. 대불은 선뜻 감정이입이 어렵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감정선을 따라가다가 그냥 자꾸 놓치게 된다. 손도 발도 너무 크다.

석굴을 나와 쾌속정을 타고 돌아간다. 병령사석굴은 티베트에서 당나라로 가는 중요한 도로였다. 7세기 이후 티베트 문화권 지역에 강력한 왕국인 토번(吐蕃)이 등장한다. 763년에는 간쑤 남부지역을 장악하고 군대가 주둔한다. 심지어 당시 당나라 수도 장안도 점령한다. 티베트 문화가 풍성한 간쑤 남부로 서둘러 찾아간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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