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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위한 천도인가

입력
2020.07.27 15:45
수정
2020.07.27 18:46
25면
0 0
박성진
박성진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운데)가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행정수도완성추진단 1차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운데)가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행정수도완성추진단 1차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짐(朕)이 듣건대, 군자는 옛 성현들의 언행을 많이 배워 자신의 덕을 키운다고 하였다. 모든 일은 반드시 지난 일을 거울로 삼아야 하는데, 이는 제왕이 중시해야 할 덕목이다. 옛날에 천하를 다스렸던 자들을 일컬어 황(皇)이라고도 하고 제(帝)라고도 하고 왕(王)이라고도 하고 패(覇)라고도 하였다.(후략)”

이상은 1333년 원(元)나라 황제가 낸 시험 문제이다. ‘과거(科擧)’와 관련한 용어는 복잡하지만, 임금이 물어보는 것을 ‘책문(策問)’, 그에 대한 답을 ‘대책(對策)’이라는 정도만 알면 충분할 것 같다. 여하튼 위의 ‘책문’에 멋진 ‘대책’을 제출하여 ‘제2갑(甲)’, 즉 2등으로 발탁된 분이 바로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 선생이다. 흔히 ‘죽부인(竹夫人傳)’의 작자로만 알고 있지만, 그렇게만 알기엔 죄송한 어른이시다. 당시 ‘원’이라는 제국(帝國)은 지금의 미국도 넘볼 수 없는 세계의 중심이었으니 ‘전시(殿試)’ 또는 ‘정시(廷試)’라고 하는, 최종 시험에서 ‘고려인’이 2등을 한다는 것은 상상 자체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민족과 국가별로 합격자 정원도 배정이 되어 있었으니 실제로는 ‘장원’이었던 셈이다.

이곡은 공자가 쓴 ‘춘추(春秋)’의 ‘춘ㆍ하ㆍ추ㆍ동’과 ‘주역(周易)’의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 그리고 ‘황ㆍ제ㆍ왕ㆍ패’의 관계를 분석하여 황제를 감복시켰고, 이런 지명도를 바탕으로 원나라 관료로 활동한다. 그렇다면 이곡은 그런 학문과 중국어 실력을 가지고 무슨 일을 했는가. 놀랍게도 원나라가 고려에 자행하던 처녀 공납을 중지시켰다. 이곡 선생을 ‘죽부인전’ 작자로만 가르치는 교과서를 개탄하다가도, 요즘 같은 세상에 ‘친원파’로 낙인찍지 않는 것도 감지덕지라고 위안해 본다. 각설하고, 황제의 ‘책문’과 이곡 선생의 ‘대책’은 모두 ‘춘추’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시사(時事)와 유관해 보이는 ‘춘추’ 한 대목을 소개 한다.

‘춘추’ 문공 13년(BC 614)에 이런 기록이 있다. ‘주나라 임금 거제가 죽었다(?子??卒)’. 일견하면 무의미한 기록 같으나 그 속에는 음미할 만한 고사가 담겨 있다. 대략은 다음과 같다.

주나라 임금이 도읍을 옮기려고 점을 쳤다. 점을 친 사람이 말했다. “백성에게는 이롭지만 임금님에게는 흉사가 생길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이 말했다. “백성에게 이롭다면 나에게도 이롭다고 생각한다. 하늘이 백성을 낳고서 임금을 세운 까닭은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이롭다면 나는 반드시 따를 것이다.” 곁에 있던 신하들이 말했다. “천도를 하지 않으면 더 오래 사실 수 있다는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까?” 임금은 이렇게 대답했다. “임금의 진정한 ‘명(命)’은 백성을 위해서 일하는데 있다. 일찍 죽는가 늦게 죽는가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이는 임금의 진정한 ‘명’이라 할 수 없다. 백성에게 이로운 것이 나에게도 이로운 일이다.” 결국 주나라는 도읍을 옮겼는데 얼마 못가 임금이 세상을 떠났다. 군자(君子)가 말했다. “주나라 임금은 진실로 임금의 ‘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知命)”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군자’의 말에서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지천명(知天命)’을 생각해 보았다. 한 사람이 태어나면 정해진 수명도 있지만, 하늘이 맡긴 사명 즉 ‘천명’이 반드시 있고,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공자는 말한 것이 아닐까.

정권에도 두 종류의 ‘명’, 즉 정권의 수명(壽命)과 사명(使命)이 있다. 사명을 망각한 정치, 정권의 수명 연장을 위한 정치는 없어야 한다, 그런 행위가 만들 파국은 국민에게만 지워진다. 동학혁명을 짓밟은 조선왕조의 망국이 생생한 증거이다. 위정자라면 주나라 임금처럼 수명보다는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을까.

목하 여당을 중심으로 ‘천도(遷都)’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천도’가 정권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인지 통일한국의 수도를 예비하는 사명감의 발로인지 묻고 싶다. 애국심 있는 지식인이 ‘천도’가 국민에게 이로운 일인지 정권에 이로운 일인지 밝혀 주는 ‘대책’을 말해 주길 바란다.

박성진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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