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면옥' '양미옥'... 서울의 오래된 맛집이 숨어있는 서울 중구 지하철 3호선 을지로3가역 주변은 낡고 낮은 건물이 빼곡하다. 특히 4번 출구 옆 골목은 늙은 공구 가게들이 쭉 늘어서 화려한 도심 풍경과 대비된다. 페인트칠이 비늘처럼 일지 않은 가게를 찾아보기 힘들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50년 전 과거에 온 것 같다.
음습한 골목길이지만 오후 6시가 되면 분위기는 반전한다. '노가리 골목'으로 이어지는 80m 골목길은 거대한 갤러리로 변신한다. 중구가 청년 작가들과 손잡고 공구 가게 철제 셔터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입힌 '을지로 셔터 갤러리' 프로젝트 현장이다.
덕분에 반세기를 이 골목에서 버틴 'J 기기'는 저녁엔 '정원'이 된다. 영업을 마친 뒤 내려진 가로 3m, 세로 2m 남짓의 철제 셔터엔 9송이 백합이 핀다. 볼트나 너트를 죌 때 쓰는 스패너 등의 공구 그림도 함께 섞였다.
그림을 그린 김건주 작가는 "을지로 공구상가 골목을 상상력이 샘솟는 공간으로 바꾸고 싶었다"며 "가게에서 파는 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곳에서 일하는 분의 손에서 나온 기술이 꽃처럼 아름답게 피길 바라는 마음에서 백합 그림에 담았다”고 말했다.
가게의 이력을 바탕으로 예술과 만난 셔터 벽화는 쪼그라들던 공구 가게 거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개성을 중시하고 유행에 민감한 20, 30대 '힙스터' 사이에선 벌써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간판은 빛이 바랬고, 기와는 허물어질 거 같은데 셔터는 알록달록해 참 묘하고 재밌어요." '노가리 골목'을 가던 대학생 김민지(23)씨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 친구와 함께 휴대폰으로 '을지로 셔터 갤러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후미져 가길 꺼렸던 을지로 공구 가게 골목길은 셔터 갤러리 프로젝트로 미국 소호처럼 '예술의 거리'로 거듭나고 있다.
이곳에서 'T' 공구 가게를 운영하는 홍영표씨는 "이 골목길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람도 많았고, 그간 분위기가 어두웠던 것도 사실"이라며 "셔터 갤러리 프로젝트를 한 뒤 이 길을 지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고 생기가 돌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고 했다.
황학동 등 오래된 시가지가 많은 중구는 골목 재생에 힘쓰고 있다. 지역 특색을 살려 과거의 미덕을 헤치지 않으면서 현대적으로 이야기를 입혀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중구는 '노가리 골목'을 비롯해 1956년 국내 최초로 지어진 중앙아파트 등을 관광코스로 만들어 인기를 끌고 있다. 2015년부터 '을지유람'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골목 탐험’엔 지난달 30일까지 4,476명이 다녀갔다. 일상의 피로를 덜고 좁은 골목길에서 '나'를 찾기 위한 20~30대들의 '골목 여행' 붐이 궤를 같이하면서 나타난 효과다.
골목에서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서양호 구청장의 구정 철학으로 골목 재생 프로젝트는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서 구청장은 취임 전 중구를 100바퀴나 돌았다고 한다. 당시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얻은 도심 재생 아이디어들이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서 구청장은 "을지로의 도심제조업과 예술이 만나면 쇠락한 중구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며 "청년 작가들이 도시 문화를 새롭게 창조하고 인쇄, 조명 등 전통 산업들과도 협업을 강화한다면 활기 넘치는 관광 명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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