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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이후 기성세대에 대한 학생들 시선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 얼마 전 만난 대학 교수 친구가 이렇게 말하며, 박 전 시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그래서 “그의 이중적 행태에 대한 놀람과 분개와는 별도로 평생 인권과 민주화에 헌신했던 인간 박원순에 대한 안타까움은 여전하다”고 답했다. 서울시 여성가족부 경찰 검찰의 진상 규명 속도가 지지부진한 것에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가해자지만 다른 면에서는 열정적이고 겸손했던 그의 모습을 추모하는 것은 기자가 ‘386 꼴통’이기 때문인가.
□ 같은 시기 초상을 치른 고 백선엽 장군을 둘러싼 논란도 흡사하다. 한편에서는 한국전쟁 위기에서 나라를 지킨 구국의 영웅을 국립서울현충원에 매장하지 않는 것은 북한 눈치나 보는 불순 세력 때문이라고 흥분한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근무한 친일파이며, 사학 비리 등으로 수천억 원 재산을 모았으며, 한국전 당시 공훈도 스스로 과장한 허위라며 국립대전현충원 매장도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인다.
□ 죽은 이를 둘러싼 논란이 우리 사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미국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서구에서 과거 인종 차별 행적이 있는 역사적 위인들의 동상이 잇따라 훼손됐는데, 그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동상도 있다. 처칠은 말년에 자신의 동상 세울 자리를 지정하고, 동상 머리에 새똥이 쌓이는 것을 걱정했다. 그 뜻에 따라 동상 건립 초기에는 머리 꼭대기에 금속 꼬챙이를 꽂아 새를 쫓았으며, 그 후에는 머리에 전기를 흘린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 달리 동상을 훼손한 것은 새가 아니라, 그의 행적에 반감을 품은 시위대였다.
□ 반면 중국 개혁ㆍ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은 “조문소도 설치하지 말고, 유해는 화장해 바다에 뿌리고, 기념관도 동상도 세우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큰 인물의 죽음은 언제나 산 사람들의 정치적 도구가 되고, 그래서 증오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은 아닐까. 사과해야 할 가해자가 사라진 상황에 더 상처받았을 성추행 피해자의 아픔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고인이 이룬 성취마저 부정되는 것 역시 그만큼 아프다. 존경할 위인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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