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메뉴를 정해 보자. ‘나는 김밥, 너는?’ ‘나도 김밥’처럼 말한다. 말 그대로라면, 한국인은 먹을 음식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말을 못 알아듣는 한국인은 없다. 주어 중심 언어에서 보면 말이 안 되지만, 한국어는 화제 중심, 상황 맥락 중심의 언어이다.
서양인은 명사로, 동양인은 동사로 세상을 본다고 한다. 한 전문가는 차를 권하면서 ‘More Tea?’라는 영어와 달리 ‘더 마실래?’라고 하는 한국어에서 차보다 사람의 행위를 더 살피는 동양의 세계관이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인은 사람과 동작을 일체화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익숙한 상황에서 예상되는 움직임까지 생략해 버린다. 이런 한국어 표현 기제는 외국어 생성에도 적용된다. 한국의 여러 식당에서 ‘물은 셀프 서비스입니다’를 번역한 ‘Water is self-service.’를 볼 수 있다. 국외 식당에서 한국인이 영어로 ‘I am...’으로 주문한 웃음거리도 종종 들려온다.
‘나는 김밥’에는 김밥을 먹겠다는 사람의 의도가 들어 있다. 관계성이 중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의도까지 읽어내야 하니 참 어렵다. 그러나 어떤 말을 생략할 수 있는 것은 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서로 공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비 오는 골목길, 우산 아래에서 연인의 고백을 들어보자. 두 사람밖에 없는데, 주체와 객체를 다 밝히며 힘주어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하는 것은 멋쩍지 않을까? 상황과 관계성을 담은 한국말 덕분에 우리는 그 순간, 눈을 보며 ‘사랑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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