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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 판사 “사법부가 국민에 버림받았음을 판사들은 알아야”

입력
2020.07.16 20:00
수정
2020.07.18 21:15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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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공개 비판하는 내부의 목소리

류영재 대구지법 판사가 한국일보 김희원 논설위원을 만나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 판결 등 사법부의 성범죄 판결 논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대구=왕태석 선임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류영재 대구지법 판사가 한국일보 김희원 논설위원을 만나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 판결 등 사법부의 성범죄 판결 논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대구=왕태석 선임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세계 최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를 운영한 손정우에 대해 법원이 범죄인 인도 불허 판결을 내려 거센 비판에 휩싸인 것이 불과 열흘 전이다. 그 전후에 '성범죄 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다'는 사실을 절감케 한 사건은 또 있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모친상에는 대통령 조화와 여권 인사들의 조문이 몰렸고,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혐의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와 진상규명 논란은 진행 중이다. 성 인식이 급변하는 이 시기에 사법부는 뿌리깊은 불평등을 제도적으로 유지하는 핵심으로 지목된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법원에서 이례적으로 사법부를 공개 비판하는 대구지법 류영재 판사를 만나 국민 인식과 동떨어진 판결을 거듭하는 법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류 판사는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마치 나만 예외인 판사처럼 비칠까 걱정”이라고 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 이후 고소인 2차 가해, 진상규명 요구, 고소사실 유출 등으로 논란과 분열이 심하다.

“고(故) 박원순 시장은 생전 여성인권 신장에 기여하신 분이다. 죽음과 성추행 혐의 모두 충격적이었다. 우리 공동체는 생전 고인이 지지했던 방식대로 풀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피해자의 진술을 경청하고, 피해자에 대한 무분별한 의혹 제기나 편견 및 선입견에 기반한 공격을 차단하고, 공정하고 객관적인 진상 규명 절차를 진행해 나가며, 만일 성폭력 사실이 밝혀진다면 피해 회복 및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하는 것이 그런 방식이다.”

사법주권 지키느라 사법정의 구현은 포기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 판결을 평가해 보자. 서지현 검사(법무부 양성평등정책 특별자문관)는 판결문을 ‘권위적인 개소리’라고 했다. 뭐가 문제인가.

“손정우 불송환 결정은 분명 이례적이다. 국제법상 자국민 불인도 원칙은 범죄인인도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때에 해당하는 것이지 조약 체결국 사이에선 절대적 불인도 사유가 없는 한 인도가 원칙이다. 재판부도 이를 인정한 뒤 불송환 결정의 근거로 사법주권 행사와 국내에서 성범죄 수사를 완결해 아동인권을 보장할 필요성 2가지를 들었다. 이를 보자마자, 재판부가 웰컴투비디오 추가 수사 가능성을 법무부를 통해 심리를 했는지 궁금했다. 추가 수사가 진행 중이라면 불송환의 타당한 이유가 될 수도 있으니까. 다만 사이버 성범죄 수사시 IP와 자금을 추적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플랫폼 운영자의 진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시 의아함은 남는다. 하지만 추가 수사는 계획조차 없고 자금ㆍIP 추적도 다 미국에서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한국이 주도해 추가 수사를 할 수 있고 손정우가 중대한 협력 없이 내려진 것 아닌가 의문이 든다.

사실 비판 여론의 핵심은 애초에 손정우의 성범죄에 확정된 1년6개월형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사법정의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라 생각한다. 엄벌주의에는 반대하지만 중범죄는 중범죄로서 책임을 지워야 옳다. 성착취물 유통 플랫폼을 운영한 손정우는 반인륜적인 아동 성범죄를 기획·조장한 것이고, 이에 합당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 사법정의의 핵심이다. 우리나라 국민은 손정우 사건에서 한국 사법이 사법정의를 세우는 데 실패했다고 판단했다. 송환 요구는, 한국 사법이 실패했으니 다른 나라의 사법제도를 통해서라도 사법정의를 구현하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번 법원 결정으로 그 기회조차 박탈됐다. 아마 국민들은 이 결정을 사법정의 구현을 최종적으로 막은 결정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결국 손정우 불송환 결정은 사법주권 행사의 가치와 사법정의 구현의 가치가 충돌한 사안에서 전자를 택한 결정으로 볼 수 있을 것같다. 상충된 가치를 다 만족시킬 수 없어 한 쪽 손을 드는 재판을 했다면, 포기된 가치에 대한 비판은 사법부가 감수해야 한다. 비판 여론을 두고 재판 독립 침해라거나 판사 위협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다. 판사들은 디지털 성범죄 재판에 있어 사법정의 구현에 얼마나 실패했는지를, 사법부가 국민들에게조차 버림받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에 분노한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모인 1,000여명의 시민들이 10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초역 앞에서 사법부 규탄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에 분노한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모인 1,000여명의 시민들이 10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초역 앞에서 사법부 규탄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시대 못따르는 판사들 디지털성범죄 경범죄로 판단

-일반적으로 성범죄에 대한 형량이 너무 가벼워 사법부가 n번방의 공범이라는 말을 부정하기 어렵다. 판사들의 인식이 일반 국민과 이토록 괴리가 큰 이유가 도대체 뭔가.

“우선 사회적으로 디지털 성범죄를 중범죄로 인식하기 시작한 게 얼마 안 된다. 연예인 동영상 유출이 성범죄 아닌 스캔들로 다뤄지고 피해자가 사과하고 유포자에겐 아무 제재가 없던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신체적 성범죄보다 더 심한 인격적 살인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인식은 2015년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고도 한참 후에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회적 인식도 피해자의 절규를 못 따라잡는데, 판사들의 인식은 사회의 변화보다 더 늦는 게 문제다. 지금도 성범죄를 실수로 보는 인식, 피해자 잘못 아니냐는 피해자 책임론, 피해자다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디지털 성범죄 피해가 다른 성범죄보다는 가볍다는 인식이 법원 내에 일부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손정우 사건의 양형도 이해는 된다. 디지털 성범죄는 아직 양형기준이 없어 판사들은 유사사건 판례를 검토하게 된다. 지금까지 아동 성착취물을 포함해 디지털 성범죄는 죄다 경범죄로 다뤄졌다. 법원에선 집행유예, 벌금형과 선고유예, 검찰에선 기소유예와 약식기소가 많다. 판결의 형평성을 강조하는 한국 문화에서 나만 엄한 판결을 내리면 피고는 판사를 잘못 만났다고 생각한다. 실형을 선고한 손정우 재판부는 오히려 양형이 너무 센 게 아닌가 고민했을 수도 있다.

두번째 문제는 재판과정에서 피해자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피해자가 법정에서 피해를 호소하고 사건을 재현하는 재판은 미국드라마에나 나올 뿐 현실의 형사재판은 5분, 10분 재판이다. 신체접촉 성범죄 사건에서는 피해자 진술이 더러 나오지만 이 경우에도 초점은 피해 자체가 아니라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에 맞춰진다. 피해자 진술이 등장하는 이유 자체가 주로 화간 여부를 다투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성범죄는 더 심각하다. 사진 영상 등 물증이 있으니 피고인은 대부분 자백한다. 다툴 게 없으면 재판부는 피해자를 부를 생각도 안 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무수한 익명의 피해자가 있는데도 특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판부가 마치 피해자 없는 사건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경범죄로 취급했던 것 아닌가 생각한다. 수백장의 불법촬영물 증거가 있는데도, 마지막에 촬영하다가 잡히게 된 딱 한 명의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로 감형한 재판부도 있다. 판사들의 낡은 인식, 피해자가 증발된 재판의 구조, 전과도 없는 평범한 남성의 모습을 띤 피고인 이런 점들이 결합된 결과 ‘한번 실수로 인생 망치게 할 수는 없지’라고 말하는 듯한 판결로 이어지는 것 아닐까.

성범죄 솜방망이 처벌의 원인은 구조적이고 복합적이나 결국은 사법부가 자초한 셈이다. 판사가 시대의 변화, 새롭게 대두되는 범죄의 양상을 적극 이해하려 하지 않고 무지한 채로 재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재판을 편의적으로 운용하며 피해자 진술권을 생략하는 구조를 만든 책임도 있다. 나아가 그런 문제점을 인식한 개인들도 내부에서 개선과 자성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나에게도 그러한 책임이 있다. 2015년부터 디지털 성범죄 피해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개인적 관심에 그쳤다. 동료 판사들과 토론하거나 주의를 환기하지 못했다. 재판으로 실천해 내지도 못했다. 내부의 움직임이 없으니 관행이 굳어졌고 뒤집지 못했다. 사법부 모든 판사의 책임이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판사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손정우에 징역15년 가능하나 형평성 고려했을 것

-판결을 비판하면 입법 미비를 탓하거나, 정해진 기준을 적용할 뿐이라는 소극적 수동적 입장을 보이는 판사들이 많다.

“최소한 성범죄 양형에 있어선 비겁한 말이다. 법정형 내에서도 중형 선고가 가능한데 중범죄를 경범죄로 다루고서 입법 탓을 하면, 법정형이 과도하게 무거워지는 방향으로 간다. 법정형이 10년 이하 징역인데 판결에서 벌금형이나 가벼운 징역형 내지 집행유예를 선고하니까 이제 입법으로 하한선을 정한다. 이런 식으로 법정형이 가중되면 구제받을 만한 사람도 중범죄자가 된다. 입법미비로 핑계댈 수 있는 것은 성인 대상 성착취물 소지죄에 대한 처벌이 최근 법 개정 전까지 없었다는 점, 아동 대상 성착취물 소지죄가 징역 1년 이하로 지나치게 가벼웠다는 점뿐이다. 손정우에 대해서도 징역 10년까지, 경합하면 15년까지 선고가 가능했다.”

11일 n번방 주범 조주빈의 공판이 열린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가 성범죄 피해자와 연대의 의미로 끈을 잇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스1

11일 n번방 주범 조주빈의 공판이 열린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가 성범죄 피해자와 연대의 의미로 끈을 잇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스1

-법원이 성범죄에 무거운 처벌을 내리도록 하기 위한 방법은.

"가장 시원하게 바꿀 길은 양형기준을 통해서다. 양형기준이 높게 설정되면 판사들이 따른다. 시민들이 양형위에 무거운 양형기준을 요구하는 것이 충분히 효과적이다.

또한 피해자 목소리가 어떤 식이든 재판과정에 들어와야 한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피해자 진술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이를 모르고, 모르니까 행사를 주장하지 않고, 변호사는 알아도 재판부가 잘 허가 안 하니까 하지 말자고 한다. 재판부는 2차 가해를 방지한다며 피해자를 재판정에 안 부르고 비대면 조사조차 안 한다. 반면, 피고는 재판 시작부터 양형사유로서 인생스토리 반성 등을 세세히 적어내고 재판부와 라포를 형성한다. 이런 재판 구조를 바꿔서 피해자가 피고인과 대등하게 말할 기회를 줘야 한다.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는 대규모 불법촬영 같은 경우엔 검찰이 범죄가 초래하는 피해상황에 대한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자기 판결 비판받으면 법원 잘못이라는 판사들

-우리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를 범죄로 인식하게 된 게 최근인 것은 사실이나, 판사들 인식이 뒤처져도 너무 뒤처진다. 양형기준은 법원이 정하는 것인데 법정형량이나 국민 감정과 왜 그토록 차이가 나야 하나. 판사가 적극적으로 법을 해석하고 형량에 변화를 주면 왜 안 되나.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면 대형 사고나 비리는 한두 명의 악인(惡人)에 의해서가 아니라 침묵하는 다수의 방조자, 다양한 의견 개진과 민주적 토론을 억누르는 조직 문화에서 흔히 발생한다. 지금 사법부의 실패가 그런 것 아닌가.

"재판 독립이 수십년간 강조되면서, 판사들 사이에 외부로부터의 일체의 재판 비판을 거부하고, 남의 재판에도 신경쓰지 않고, 내 재판에 대해서도 어떠한 평가를 받지 않는 것이 재판 독립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싹튼 것 같다. 진정한 재판 독립은 판사가 재판을 독립해서 하는 대신 자신의 재판에 대해 온전한 책임도 져야 한다는 의미인데 지금은 책임이 실종된 느낌이다. 재판을 할 때 지나치게 상급심에 의존하는 한편, 자신이 내린 판결인데도 비판을 받으면 법원 전체의 잘못이라고 해명한다. 재판 자체가 사법부 집단 전체의 의사결정인 것처럼 인식되고 운영된다.

특히 판사에게 자신의 재판을 책임지도록 할 통제와 견제 장치가 너무 없다. (성범죄 사건) 판결문은 공개되지 않고 판사의 연임평가는 재판과 무관하다. 법관 연수에서는 시민사회로부터 비판받는 부분에 대한 개선책은 논의되지 않고 대법원 판결 법리 분석만 한다. 판사 입장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칠 유일한 존재인 상급심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법관사회가 폐쇄적이고 권위적인데, 이에 더해 재판에 대한 법원 내외부의 통제와 견제가 전혀 없는 구조다.

지난 6일 미국 송환 불허 결정으로 석방돼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는 손정우. 뉴시스

지난 6일 미국 송환 불허 결정으로 석방돼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는 손정우. 뉴시스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서열문화도 강하다. 합의부 판결은 판사 3명이 합의하는 것인데도 부장판사의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부장판사와 구성원판사(배석판사)의 관계는 매우 권위적이다. 저 연차 판사가 오히려 시대변화에 민감할 수 있지만 부장판사가 열려 있지 않은 경우 합리적인 토론을 하기 어렵다. 구성원 판사가 자기 뜻을 고집할 경우 부장 판사는 만(萬)가지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재판부 일정을 무리하게 잡거나 평정을 이상하게 한다거나 등. 전통적으로 이 관계는 재판부 내부의 문제로 여겨 문제 제기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충처리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제대로 운영된 사례가 없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연차를 초월한 합리적인 토론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중범죄 사안들이 몰리는 합의부에서 시대정신에 뒤떨어진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판사 한 명이 재판하는 단독 사건도 견제와 비판이 없으면 마찬가지다.

최근 성범죄 판결에 비판적인 내부 목소리가 나온 적이 있다. 지난해 레깅스 입은 여성 뒷모습을 불법촬영한 사건에서 재판부가 무죄 판결을 내리며 문제의 사진을 판결문에 크게 첨부한 일이 있었다. 아무리 무죄라 해도 피고인이 받아보는 판결문에 사진을 올린 데 대해 사법부 내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또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설문조사에 대해 설문 내용 자체가 문제라는 비판도 제기됐었다. 그간 사법부 문화에 비추어 흔하지 않은 문제제기였다. 그런데 문제제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일었다. 판사들이 판결에 대해 자성하거나 비판하면 '제대로 논의해 개선해 보자'고 반응하기보다는, '어떻게 판사가 다른 판사를 비판하냐' 내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법원 내부에 항상 존재해왔다.

그래도 사법농단이 드러난 2017년 이후로 법원의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시민사회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자성하자는 목소리가 보인다. 언젠가 그런 이들이 다수 될 것이다. 법원이 열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재판은 연임과 무관… 판사 견제할 장치 없어

-성범죄 재판에 대해 법원 내부에 변화의 움직임이 있나.

“시민들이 최근 성범죄 재판을 방청하면서 문제점과 개선점을 법리적, 절차적으로 지적하는 방식으로 재판을 비판한다. 법원 내에서도 이를 경청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 같다. 또 젠더적 관점에서 판결들을 분석하거나, 성범죄 재판 절차의 개선점에 대해서 연구하거나, 디지털 성범죄 등 새로운 유형의 성범죄에 대해서 공부하는 등의 활동이 보인다. 법원은 원래 보수적이고 시대변화를 선도하는 조직이 아니다. 그러나 시대변화를 따라가려는 판사들의 활동이 법원 내부에서 공유된다면, 법원도 점점 변하지 않을까. 법원은 검 경과 달리 상부의 지시로 일시에 변할 수는 없다. 아주 느리고 답답하다. 하지만 한 번 인식이 바뀌면 다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 결정을 내린 강영수 재판장의 대법관 후보 자격 박탈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은 14일 50만명이 넘는 동의를 얻었다. 청와대 홈페이지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 결정을 내린 강영수 재판장의 대법관 후보 자격 박탈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은 14일 50만명이 넘는 동의를 얻었다. 청와대 홈페이지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오덕식 판사의 일련의 성범죄 판결들을 문제삼아 재배당을 주장했고, 손정우 불송환 결정을 내린 강영수 판사의 대법관 후보 자격 박탈 청원에 50여만명이 동의하는 등 판사 개인에 대한 시민들의 압박이 거세다.

“판사들의 우려가 상당하다. 오 부장판사 스스로 재배당 요청을 한 것이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재배당되었다는 점에서 위협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오 부장판사가 증거조사 방법으로서 불법촬영 동영상을 본 것이 명백하게 위법한 재판진행이 아님에도 쟁점이 됐다는 점에서 여론에 의한 재판 독립 침해라고 보는 판사들이 많다. 한편으론 사법부가 성범죄 판결에서 지속적으로 불신을 불러 일으키다가 오 부장판사 재판에서 터졌다는 시각도 있다. 오 부장판사가 혼자 책임을 뒤집어 썼다는 동정론과 함께 사법부가 신뢰를 잃은 데 대해 고찰해야 한다는 여론이 병존한다. 개인적으로는 국민청원이 실질적으로 판사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기 때문에 재판 독립이 침해되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본질은 사법부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라는 점에 주목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결문 공개해 비판받도록 해야 민주적 통제 가능

-법관 사회를 획기적으로 바꿀 방법은 없을까.

“바꿀 요인이 없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니. 판사 평정은 파기율, 사건처리 속도, 여기에 덧붙인다면 법원장 눈에 들었느냐일 뿐 재판을 어떻게 했는지는 평가 대상이 아니다.

판사를 견제할 방법 중 하나는 판결문을 (사건번호를 몰라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해 칭찬과 비판이 가능토록 하는 것이다. 최근 여성들이 연대해 성범죄 재판을 방청하고 판결문을 비판하는 활동을 하는데, 이것이 판사들에게 자기 재판에 책임을 지게 만든다. 판결문 공개와 리뷰는 정당한 민주적 통제임을 판사들이 깨달아야 한다. 물론 개인정보 보호나 사생활 보호를 위해 판결문을 비공개할 장치도 필요하다. 이런 절차 하에 원칙적 판결문 공개는 여성단체들도 원한다. 다른 나라도 공개한다.

재판결과를 직접 판사 평정과 연임 평가로 이어지게 하는 것은, 중대적 절차 위반 정도라면 모를까 위험성이 크다. 다만 재판에 대한 외부 평가를 장기간 축적해 어떤 식으로든 연임 평가에 반영하는 것은 필요한 것 같다. 그래야 판사들이 사회의 변화를 체크하며 재판을 하게 된다. 외부 여론을 이겨내야 훌륭한 법관이 된다는 뿌리깊은 고정관념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법을 만들고 지키는 주체는 국민인데, 법을 해석하는 재판에서 사회와 괴리된 인식을 적용한다면 법과 국민이 유리된다. 법은 판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재판은 잘못된 재판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류영재 대구지법 판사는 사법부를 공개 비판하는 극히 예외적인 판사다. 하지만 자신도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했다. 대구=왕태석 선임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류영재 대구지법 판사는 사법부를 공개 비판하는 극히 예외적인 판사다. 하지만 자신도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했다. 대구=왕태석 선임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파격적 사법부 개혁 방안은 부작용 무시 못해

-탄핵절차를 통해 결격사유가 있는 판사를 걸러내는 것은 필요하고 가능한가. 국내에선 판사가 탄핵된 사례가 아직 없지만 사법농단 연루자에 대한 탄핵요구가 있고 미국에선 2018년 성폭행을 저지른 명문대생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판사를 주민소환제도를 통해 해임한 사례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탄핵사유 즉 위헌적인 공권력을 행사했는지를 살펴서 판사에 대한 탄핵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판사직을 정말 좋아했던 내게 사법농단은 정말 큰 충격을 안겼다. 이후 사법농단을 동정하고 합리화하는 일부 판사들의 태도에 더 상처를 받았다. 이처럼 사법농단을 정당화하려는 분위기에서 그 위헌성을 분별하기 위해서라도 탄핵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범죄 재판에 대한 탄핵에 대해선 명백하게 위헌인 재판이 과연 몇 개나 될까 의문이 든다. 군사독재시절 고문에 의한 진술을 증거로 삼아 장기형을 선고한 판결 정도나 위헌 판단이 가능하지 않을까.

판사선출제, 배심제, 판사소환제 등 미국의 사법제도에 대해선 우리 사회의 인식이 미국과 굉장히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예컨대 판사선출제의 경우, 사법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에서 과연 정파성을 띤 판사 후보들을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배심제에 대해서도 전문성과 사회적 합의 중 어디에 법적 권위를 부여할 것인지 양국간 인식이 다를 수 있다.

속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하긴 어렵다. 나도 내가 비판하는 사법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내가 하는 비판은 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사법부 변화를 위한 파격적인 대안들을 보면, 솔직히 부작용이 먼저 떠오른다. 재판 결과만 갖고 판사를 탄핵하거나 소환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 것이다.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은 재판을 좀 더 투명하게 공개하고 판사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게 해, 재판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방식이다.”

대구= 김희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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