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뭐 혹시 보내줄 거 없니?” 오랜만에 걸려온 친한 지인의 전화. 반갑게 받았더니, 다짜고짜 뭔 물건을 내놓을 게 없냐는 게 아닙니까? “응? 누나 뭔 물건이요?” “뭐든 괜찮아. 지나간 애인, 친구, 은사님 등등 추억이 남아 있는 건 뭐든 좋아.” 전말은 이랬습니다. 문화기획자가 직업인 그녀는 ‘X의 유물’이라는 행사를 기획했던 거였는데요. 이제는 ‘옛사람’이 된 사람들, 그러니까 X보이프렌드, X걸프렌드 등등 지나간 인연이 남긴 추억의 물건과 그것에 얽힌 추억을 써서 경매에 내놓고, 그 낙찰가를 전액 기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며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지요. 가장 작은 방 한쪽에서 딱 적당한 물건들을 발견했습니다. 한쪽에 모여 있는 토토로 인형 모음. 옛 연인에게서, 매 100일 기념일마다 하나씩 받았던 선물들이었습니다. 10여마리가 넘으니 1,000일을 넘게 교제한 셈이지요. 연애가 끝나면 모든 물건을 칼같이 정리해 버렸던 제가, 웬일인지 이것들만큼은 그대로 두었더군요. 예쁘게 포장을 하고, 물건에 담긴 추억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서른여섯 살. 저는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이 토토로 들은, 지난 연애에서 100일마다 하나씩 받아온 것입니다. 자신보다 제가 우선이었던 옛 연인이 주었던 것이지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이거든요. 항상 이 인형들을 제게 주며 그 사람은 물었습니다. “이 토토로가 거대한 마을을 이룰 만큼, 우리는 오래 만날 수 있겠지?” 슬프게도 그렇게 되지는 못한 채, 우리는 이별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들을 웃으면서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마지막이 건강한 이별의 형태였기 때문이었겠지요. 부디 이 인형들이 누군가에게 가 닿아, 또 다른 설렘이 되길 기원합니다. 매 순간 포장을 뜯으며 설렜던 지난날의 저처럼요.’
써 보낸 글귀와 인형들이,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쯤. 어쩐지 마음속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마지막을 건강하게 떠나보낼 수 있는 것도 참 흔치 않은 일이라고요. 건강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참 다행이라고요. 살다 보면, 회상하는 것조차 괴로워지는 이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린 시절, 연인이 바람을 피워 헤어지고 말았던 날. 울고 있는 제게 교수님이 그랬지요. “뭐든 마지막이 중요한 거야. 연애든 뭐든. 아무리 4년을 사귀고 잘해 줘도 마지막에 바람피워서 헤어지면, 곱하기 0 이 돼 버리는 거야. 지나간 시간이 전부 0이 되는 거라고. 그러니, 걘 네 인생에서 없었던 거야. 잊어 버려.” 위로의 말이 감사했지만, 슬픔도 못지않게 컸습니다. 떠나간 사람을 기억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만큼 슬픈 게 있을까요. 그와 함께했던 내 삶의 시간도 봉인해 버리는 셈이니까요.
이번 한 달은 참 많은 어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 음악에 헌신해 온 어떤 어른은 전 세계가 입을 모아 애도했고, 또 이 도시를 만들어 왔던 어떤 어른은 추모하는 것 자체가 갑론을박이 되어 버리는 씁쓸한 상황이 됐습니다. 이토록 다른 두 죽음 앞에서, 복잡한 마음이 드는 건, 비단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며칠 밤을 뒤척여도, 답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떠나보내는 것이 옳은 걸까요. 우리에겐, 너무 큰 숙제가 남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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