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생전 ‘박원순’의 이름 뒤에는 으레 인권과 시민이 따랐다. 특히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공동 변호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낸 이가 그다. 페미니스트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향하는 정치인으로 보는 게 보편적 인식이었을 게다. 충격적인 비보가 전해진 9일 밤 전까지는. 수년 간 서울시 직원을 성추행 한 혐의로 고소당한 사실을 접하고 대책회의까지 열었다는 그는, 다음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 그를 아끼던 사람들조차 마음 놓고 애도하지 못한다. 조문 여부는 정치 행위가 돼버렸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법적 대응을 결행한 피해자일 것이다. 자신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건 아닌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미투’를 고민하던 다른 사건의 피해자들은 주저하는 마음이 들어 괴로울 테다.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한 결말. 그의 죽음은 세상을 찢어놓았다.
□ 그런 고인이 속했던 정당 대표는, 공적 추모의 장에서 기자가 성추행 의혹 대응 여부를 묻자 “예의가 아니다”라더니, “후레자식”이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 말에 담긴 건 뭔가. 사건을 거론하는 것조차 무례함으로 몰아붙이는 도덕적 순결주의, 전국적 추모가 누군가에겐 가해행위가 될 수 있음은 고려하지 않는 정치적 무책임, 예의의 이름으로 무례를 저지르는 아이러니다. 피해자에겐 ‘가만히 있으라’는 압력으로 느껴지리라는 생각은 못했을까. 국민 대신 마이크를 든 기자조차 그저 ‘못 배워먹은 어린 남자’로 몰아붙일 수 있는 위력을 누리는 그 장면에 씁쓸함이 더해진다.
□ 고인과 유족에 대한 예의 못지 않게 중요한 게 피해자에 대한 예의고, 보호이며, 연대다. 나아가 더불어민주당이 국민에게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예의는, 소속 단체장들이 연달아 셋이나 성폭력 의혹으로 나락에 떨어진 위태로운 정당으로 보는 시선에 답을 내놓는 일이다. 너무 기대가 큰가. 실언은 대표가 언론 앞에서 했는데, 사과는 수석대변인이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했다는 보도까지 접하니, 그 예의의 수준에 그저 ‘웃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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