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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

입력
2020.07.10 22: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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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모가 하늘 나라로 떠났다. 이모부란 작자가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동안, 어린 나이에 네 남매 키우느라 갖은 고생을 다 겪은 분이다. 어릴 적엔 교류가 잦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만날 일이 줄었고 안부를 주고 받는 것도 드문 일이 되었다. 고향에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 뵙지 못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농담을 걸던 젊은 이모의 모습도 이젠 옛날 기억이다. 

빈소는 한산했다. 오랜 시간을 건너 마주앉은 사촌들은 반가우면서도 어색했다. 어릴 적 발가벗고 물놀이하던 형과 동생들은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남남처럼 서먹한 사이가 됐다. 낯선 얼굴의 매제와 조카를 만나니 반가움보다 어색함이 앞선다. 

투병 중인 이모의 곁을 지킨 것은 딸들이다. 번갈아 간호하던 두 딸 중 임종을 지킨 것은 막내 J였다. 합병증으로 고통이 심하셨지만 잠든 사이 떠나셨다고 했다. 힘든 투병 생활에 비하면 편안한 마지막이셨기를.

나에겐 이모지만, 어머니에겐 가장 가까운 동생이었다. 모시고 내려가는 동안 맘이 어떠실지 걱정됐지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감정 표현이 없으셨다. 동생의 부음을 듣고도 기어이 한나절 더 일을 하시고서야 빈소로 향하는 중이었다. 어머니 연세가 되면 가까운 사람들과의 영원한 이별도 익숙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은 무너지는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신 걸까. 이모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한 듯한 모습이 괜히 더 불안해 운전대를 잡은 내내 슬쩍 눈치를 보며 실없는 농담을 지껄였다. 

빈소에 당도한 뒤에도 감춰져 있던 어머니의 슬픔은, 이모의 큰 딸 S가 들려준 유언 앞에 파도처럼 밀려 왔다. 흐느끼는 어머니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고, 낯선 분위기에 긴장했던 나에게도 그제서야 슬픔이 전이됐다. 

이모는 S에게 유언을 남겼다. 낯선 표현이긴 했어도 S는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이모는 영원히 눈을 감기 전날 밤, 곁에서 자리를 지키던 큰딸의 볼에 뜬금없이 입을 맟추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 

큰 의미가 담긴 말인 줄 몰랐던 S는 답례로 입을 맞춰드리고 J와 간병을 교대한 뒤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입술에 딸의 온기를 담은 이모는 그날 밤 잠이 든 뒤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 S는 그게 마지막 대화일 줄은, 유언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며 섧게 울었다. 

떠날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떠날 때를 알게 되는 것일까. 이모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를 전해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영원한 이별을 예감하고 건넨 한 문장에 담긴 진심이, 삶에 대한 그 어떤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아 말문이 막혔다.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 둔 채 홀로 세상을 등지는 마음은 어떤 색깔일까. 소중한 사람에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이별을 체감하는 그 순간, 이모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떠나는 자신보다, 남겨질 가족들의 위안을 더 걱정하지는 않았을까. 이모가 남긴 마지막 말이 산 자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부음은 망자를 기억하는 이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힘이 있다. 추모와 추억이 뒤섞인 마음으로 빈소에 모인 사람들은 망자와의 기억을 되새기며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 받았다. 번잡한 삶 속에서 잊고 지내던 소멸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적어도 이 순간만큼 확실히 되새기는 때는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추모의 마음만 떠다니는 게 아니다. 이모 덕분에 모처럼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은, 과거의 일들을 되뇌이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헤어짐을 예비할 수 있는 행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남겨질 사람들에게 인사의 말을 건네고, 그들에게 상처를 덜 남긴 채 떠날 수 있다면 꼭 다시 만날 '다음'의 약조도 아름답게 간직할 수 있지 않을 것 같다. 

(향자) 이모, 편히 쉬세요. 그동안 많이 감사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서형욱 풋볼리스트 대표ㆍ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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