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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우리 그림 속을 거닐다] 길고양이 현실부터 이상향까지 아우르는 작가, 이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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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우리 그림 속을 거닐다] 길고양이 현실부터 이상향까지 아우르는 작가, 이은규

입력
2020.07.11 04:2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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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로 인간 탐구하던 작가?
패러디 민화에서 멸종위기동물 초상까지?
" 길고양이 비롯한 ‘도시 동물’ 그리고파"



◇민화로 그린 길고양이의 초상

고양이는 야생동물과 반려동물의 중간쯤, 그 어딘가에 존재한다. 때로 길들지 않는 야성을 보이면서도 마음 준 사람에겐 더없이 살가운 동물. 이은규(36)는 그렇듯 중간자적인 모습을 길고양이에게서 발견하고 그들의 초상을 그려낸다.

경기 수원시에 위치한 작업실 ‘미열화실’에서 작업 중인 이은규 작가. 붓 두 자루를 동시에 쥐고 한 자루는 채색할 때, 한 자루는 바림질에 쓴다.

경기 수원시에 위치한 작업실 ‘미열화실’에서 작업 중인 이은규 작가. 붓 두 자루를 동시에 쥐고 한 자루는 채색할 때, 한 자루는 바림질에 쓴다.

고양이, 삵, 호랑이…. 이은규가 그린 고양잇과 동물의 초상을 보며 윤두서가 떠올랐다. 올올이 흩날리는 수염 한가운데 빛나는 눈. 300년 전 화가의 눈빛이 여전히 형형한 건 초상화에 외형뿐 아니라 인격과 내면까지 그리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정신이 담겨서일 것이다. 

학창 시절 윤두서의 자화상을 가장 좋아했다는 작가는, 조선 시대 초상화에서 ‘진(眞)’이란 개념에 매료됐다. 이는 ‘왜곡되지 않은 대상의 내, 외적 실체’를 뜻한다. 작가가 즐겨 그리는 대상은 인물에서 동물로 확장됐지만, 언제나 변하지 않는 건 ‘진짜 모습’에 대한 열망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서 눈에 영혼이 박제된 듯한 강렬함을 잊을 수 없었죠. 한국화에서는 외형만 베낀 그림은 겉핥기일 뿐 실체를 담지 못한다고 봐서, 임금 초상마저도 미화하는 걸 지양했죠. 우리 그림은 그렇듯 꾸밈이 없잖아요.”

◇ 고양이 그림은 ‘휴식’이다

학창 시절 그림을 통해 ‘참된 나’를 알아가는 작업에 매료된 작가는 인물화에 매진했다. 2013년 대학원 졸업 작품인 ‘인지적 초상’ 시리즈는 작가의 친엄마 이미지와 한국인이 지닌 보편적인 엄마 상을 겹겹이 겹치고 다시 분리해내는 작업이었다. 그것은 십대 시절 엄마와 떨어져 할머니 손에서 자란 작가가 트라우마에서 해방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림은 엄마의 초상 위에 겹겹이 새 그림을 덧그리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엄마에 대한 기억을 수없이 지우고 덧입힌 모녀 삼대의 초상을 그리는 과정은 미술치료와도 같았다.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 1년이 걸릴 만큼 작업은 지난했다. 언뜻 인물화와 무관해 보이는 고양이 민화도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를테면 고된 작업 중의 휴식 같은 역할을 한 게 고양이 그림이었던 셈이다. 

작가의 집에는 세 고양이가 산다. 2013년 7월, 임보 끝에 입양한 고양이 남매 노랭이(애칭 노램)와 껌댕이(애칭 껌디), 막내로 합류한 흰둥이(애칭 흰디). 일찍 자취를 시작해 혼자 살다 보니, 친구들이 고양이를 구조하면 늘 그에게 임보(임시 보호)를 부탁해왔다. 수많은 고양이가 집을 거쳐 갔지만 입양이 안 된 고양이들도 있었다. 노랭이와 껌디가 그랬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껌디, 노램, 흰디. 힘겨웠던 시절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준 고마운 가족의 얼굴.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껌디, 노램, 흰디. 힘겨웠던 시절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준 고마운 가족의 얼굴.

“한번은 두 마리가 한꺼번에 들어왔는데, 볼품이 없으니 입양이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못생긴 애들을 어쩌겠나, 내가 거둬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약간 교통사고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갑자기 자식이 생긴 거 같고.”

고양이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내 고양이가 생기니 길고양이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해서 고양시캣맘협의회에도 가입했다. 직장에 다니고 개인 작업도 하다 보니 캣맘 활동을 본격적으로 할 틈이 없어 주로 임보 봉사를 했다. 이 무렵 입양한 것이 막내 흰디다.

“몇 마리가 임보로 왔다 갔는데 마지막에 온 애가 꼬맹이(흰디)였어요. 문 열자마자 제 발등에 솜뭉치가 딱 올라오는데 너무 똑똑하고 예쁜 거예요. 입양 보내려고 하기만 했음 잘 갔을 텐데, 제가 보내고 싶지 않았어요. 3주차 됐을 때 그냥 입양하겠다 했죠.” 

작업실에서 세 고양이와 함께 지내던 시절 흰디(왼쪽부터), 껌디, 노램의 뒷모습. 수원으로 화실을 옮기면서 집으로 고양이들의 거처를 옮겼다.

작업실에서 세 고양이와 함께 지내던 시절 흰디(왼쪽부터), 껌디, 노램의 뒷모습. 수원으로 화실을 옮기면서 집으로 고양이들의 거처를 옮겼다.


◇ ‘행복’의 또 다른 얼굴, 고양이

다소 무거운 주제인 <인지적 초상> 연작과 달리, 반려묘와 함께한 생활을 녹여낸 초창기 고양이 그림은 위트가 넘친다. 전통 민화나 한국화 속에 고양이를 절묘하게 그려 넣어, 언뜻 보면 처음부터 그렇게 존재했던 그림 같다. <고랭모란도>(2014)는 액을 막아주는 호랑이 민화에 세 반려묘의 무늬를 그리고 모란도와 접목한 그림이다. 옛 민화 작가들이 호랑이를 직접 보기 힘드니 고양이를 보고 그렸다는 설에서 착안한 것이다. 또 다른 작품 <국정추묘 in Box>(2015)는 변상벽이 그린 <국정추묘> 원작과 뭐가 다른가 싶지만, 자세히 보면 고양이가 박스에 의뭉스레 앉아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변상벽의 에 고양이가 좋아하는 박스를 슬그머니 집어넣은 (2015).

변상벽의 <국정추묘> 에 고양이가 좋아하는 박스를 슬그머니 집어넣은 <국정추묘 in box> (2015).

<어떤 놈이냐!>(2015)는 전통적인 책가도에 세 반려묘와 현대적인 고양이 용품들을 섞어 놓았다. 고양이 숨숨집과 스크래처, 캣 터널, 밥그릇과 어묵꼬치 등이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다. 책장은 캣타워가 됐고, 서책 표지는 고양이 발톱에 너덜너덜 찢겼다. 어느 녀석이 발로 찼는지 컵도 깨져 바닥에 나뒹구는 ‘혼돈의 도가니’지만, 고양이들은 시치미 뚝 떼고 자는 모습이 제목과 어우러져 유쾌하다.

조선시대 책가도 사이로 고양이 용품과 세 반려묘의 모습을 그린 (2015).

조선시대 책가도 사이로 고양이 용품과 세 반려묘의 모습을 그린 <어떤 놈이냐!> (2015).


조선시대 영모도 도상에서 각각 따온 고양이 그림을 책가도에 집어넣고, 반려묘 무늬를 그려 넣은 (2015).

조선시대 영모도 도상에서 각각 따온 고양이 그림을 책가도에 집어넣고, 반려묘 무늬를 그려 넣은 <캣타워도> (2015).


책가도를 변형해 그린 친구네 집 고양이의 초상 . 석채로 채색한 강렬한 색감 속에 고양이의 눈빛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책가도를 변형해 그린 친구네 집 고양이의 초상 <묘가도1> . 석채로 채색한 강렬한 색감 속에 고양이의 눈빛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인지적 초상>으로 개인전 준비를 하면서 우울의 밑바닥을 파고들 때였어요. 하루는 우울해서 대성통곡하고 있는데, 고양이 똥 냄새가 나는 거예요. 치우려면 움직여야 하니 우울할 시간을 안 주는 거죠. 그때 제 삶을 놓지 않게 도와준 게 고양이였어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작가에겐 곁에 있는 세 고양이가 가장 큰 행복이었고, 현실에 단단히 발 딛고 서게 해 줄 버팀목이었다. 이 무렵 작가는 길고양이를 넘어 도시 동물들의 척박한 삶에 주목하게 되었다.

함께 사는 노램, 껌디, 흰디를 책가도 형식 배경에 담은 . 이삿짐 박스 속에 함께 들어가 있던 실제 모습을 보고 그렸다.

함께 사는 노램, 껌디, 흰디를 책가도 형식 배경에 담은 <묘가도2> . 이삿짐 박스 속에 함께 들어가 있던 실제 모습을 보고 그렸다.


◇도시 동물과 멸종위기동물의 초상을 그리다

“어떤 대상에 대해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인식이 바뀌잖아요. 동물들의 비참한 모습만 자극적으로 보여주거나, 반대로 너무 예쁜 모습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글 쓰는 친구랑 모임을 만들어 2015년부터 2016년에 걸쳐 프로젝트를 기획했어요. 여러 사회 문제 중에서도 친구는 오랜 봉사활동으로 소년 소녀 취약계층에 관심이 많았고, 저는 외할머니와 살아온 경험으로 독거 노인, 노인 빈곤 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 주제가 너무 방대해지니까 범위 좁혀 ‘도시 동물’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거죠.”

비록 이 프로젝트는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모임을 해산했지만, 도시 동물에 대한 관심은 야생동물 초상화 작업으로 이어졌다. 때마침 야생동물 조사 연구에 종사하고 있던 친오빠의 도움이 컸다. 2015년 오빠의 의뢰로 삵 초상화를 그릴 때였다. 오빠가 여러 자료사진을 제공해줬지만, 그걸 짜깁기해 그림을 그리긴 싫었다. 실존하는 특정한 삵 한 마리의 삶을 오롯이 담은 그림, 그들의 진짜 모습을 그림에서 끌어내 눈빛을 교환할 수 있을 때, 보는 이들도 삵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 믿었다. 

눈빛이 형형한 삵의 초상. 철원야생동물구조센터에 구조된 실제 삵의 사진을 보고 그렸다.

눈빛이 형형한 삵의 초상. 철원야생동물구조센터에 구조된 실제 삵의 사진을 보고 그렸다.

결국 삵 초상화는 철원야생동물구조센터에 구조된 어느 삵의 사진을 보고 그렸다. 백과사전이나 박제된 삵 사진도 참고했지만, 이는 삵의 실제 수염이 몇 개인지 등 실제 이치나 섭리에 어긋나게 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가 그린 삵의 금빛 눈동자를 보노라면, 윤두서의 자화상을 볼 때의 전율이 느껴진다. 멸종위기동물 초상화 작업은 이후 담비와 호랑이 초상화 작업으로도 이어졌다. 호랑이의 눈빛을 마주보고 기억하기 위해, 동물원 사육사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어렵게 찾아가 보기도 했다. 나중에는 ‘동행숲(동물이행복한숲)’ 모임에 가입해 단체전도 수차례 참여했고, 작가이자 기획자로서 전시 및 강연 기획까지 도맡기도 했다.

무게감 있는 멸종위기동물 작업에 잠시 지쳐 쉬고 싶어질 때, 는 다시 고양이 그림으로 돌아왔다. 몇 년 사이 고양이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고양이를 예쁜 모습으로만 미화하는 경향이 불편했다. 막상 키워보면 힘들고 애환도 많은 게 반려동물인데,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만 보고 고양이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을까 염려됐다. 그런 생각에 잠겨 옛날에 그렸던 그림들을 보니, 스스로도 고양이의 예쁜 모습에 푹 빠져 있었던 게 아닌가. 때마침 세상을 떠난 고양이의 초상화를 의뢰받으면서 고양이의 삶 전체를 아우른 그림을 다시 그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의 생로병사까지 아우르는 그림

“어느 분이 부모님을 위로해드리고 싶다면서, 세상에 없는 고양이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하셨어요. 그 고양이를 그리면서 밥 주면서 떠나보낸 길고양이들이 생각나서 <꿈> 연작을 그리게 됐죠. 원래 계절별로 네 점을 기획했는데 완성한 건 아직 두 장뿐이네요. 동백꽃을 그린 겨울 그림이 <꿈1>이고, 국화를 그린 가을 그림이 <꿈2>인데 동백에는 영원한 안식, 국화는 재생의 의미를 담았어요. 동백꽃 위에 누운 게 우리 집 애들이에요. 셋 다 사이좋기가 쉽지 않잖아요. 죽은 뒤에도 저랬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고양이의 삶과 죽음을 다룬 . 배경에 그린 국화를 통해 소멸하는 것들의 재생을 꿈꾸는 마음을 담았다.

고양이의 삶과 죽음을 다룬 <꿈2> . 배경에 그린 국화를 통해 소멸하는 것들의 재생을 꿈꾸는 마음을 담았다.

이제는 없는 고양이들이 그림 속에 되살아나는 경험, 혹은 언젠가 세상을 떠날 고양이들이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살게 하고 싶은 욕망. 작가는 최근 그리는 고양이 그림에 그 마음을 아낌없이 풀어내고 있다. 비단에 진채로 그린 <화서몽>(2018)이 대표작이다. 그림 속 고양이들은 마치 선계의 공간 같은 어딘가에 편히 쉬고 있다. 한가운데 돌아보는 흰디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그가 한때 밥을 주거나 인연을 맺었던, 이제는 세상에 없을 길고양이의 모습이다. 

상서로운 구름과 폭포, 기암괴석이 가득한 공간은 아파트에 흔히 있는 베란다다. 베란다는 집과 바깥의 중간, 그 접경을 상징한다. 도심 속 고양이 역시 야생동물과 반려동물 사이에 존재하기에 이 공간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이 중간지대의 풍경을 통해 작가는 현실을 표방하면서도 비현실에 속한 영원불멸한 공간을 이야기한다. 

길고양이와 집고양이가 모두 평화로운 이상향을 그린 (2018). 그림 속 공간인 베란다는 집과 바깥의 중간지대를 상징한다.

길고양이와 집고양이가 모두 평화로운 이상향을 그린 <화서몽> (2018). 그림 속 공간인 베란다는 집과 바깥의 중간지대를 상징한다.

“만약 이상향이 있다면, 세상에 없는 고양이들이 그곳에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고양이는 어디서나 똑같다는 마음을 담고 싶어서 살아있는 흰둥이도 같이 그려 넣었죠. 고양이의 이상향이 현실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도, 반대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라 생각해요.”

앞으로도 작가는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섣불리 ‘고양이 작가’라고 스스로를 칭하기보다, 그림으로 천천히 보여주고 싶다. 고양이 민화 중 가장 대중적인 유형은 고양이가 등장하는 조선시대 영모화(새와 동물을 소재로 그린 그림)를 패러디한 민화이지만 이 작가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해왔다. 멸종위기동물 초상화에서 집고양이와 길고양이가 모두 행복한 이상향 풍경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양이 그림이 어디까지 진화할지 기대된다. 

글=고경원
고양이 전문 출판사 야옹서가 대표, 18년차 고양이 작가.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2007)를 시작으로, 여행기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2010), 인터뷰집 ‘작업실의 고양이’(2011), 사진에세이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2013), 사진집 ‘둘이면서 하나인’(2017)을 썼다. 2009년 9월 9일 ‘한국 고양이의 날’을 창안해 고양이 인식 개선에 힘쓰고 있다.

자료 제공= 이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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