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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극인, 만신 ... 지워진 여성의 이름으로 다시 쓴 한국 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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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극인, 만신 ... 지워진 여성의 이름으로 다시 쓴 한국 근현대사

입력
2020.07.09 13: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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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

1937년 잡지 '여성' 7월호에 실린 '여학생 스케치'. 그 시절 이미 동성애 유행을 다루고 있다. 민음사 제공

1937년 잡지 '여성' 7월호에 실린 '여학생 스케치'. 그 시절 이미 동성애 유행을 다루고 있다. 민음사 제공


그때, 식민지 조선에도 ‘퀴어’가 있었다. 1921년 동아일보 기사는 “24세까지 ‘계집노릇’을 해오다 수술을 통해 남성이 된 일본인”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1929년 ‘학생’지에는 “내가 만약 그리운 옛 여학생 시대로 다시 한번 돌아간다면 나와 같은 성질을 가진 동무와 철저한 동성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절절한 고백이 실려있다. 물론 이 얘기를 다루는 시선은 곱지 못하다. '변태성욕'이라는 설명 아래, 흥밋거리 정도로 다룬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이란 현실 아래에서도 복잡한 정체성과 욕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정현의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 수록된 작품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은 그 '조선의 퀴어', 레즈비언 연인인 안나와 윤경준 이야기다.  이화학당 졸업생이자 제중원 간호사인 안나는 수양아버지의 주선으로 정략 결혼을 했다가 이혼 당한다. 여학생들끼리 사랑하는 연애소설을 쓰던 경준은 군 위안부로 끌려가 임신과 출산을 겪는다. 이들은 남장 여자, 여장 남자, 동성 연인들은 모조리 ‘변태성욕자’로 잡혀가거나 자살하는 1920년 경성을 떠나 새로운 대륙으로 향한다. 이들의 탈출을 돕는 것은 안나의 게이 친구 수성이다.

동성애, 인터섹스, 크로스드레싱, 트렌스젠더. 모두 비교적 최근 들어서야 제대로 가시화된 정체성이지만 이들은 은밀하게나마 존재해왔다. 한정현의 첫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이처럼 엄연히 존재했으나 ‘이성애’와 ‘정상가족’ 관점에서 지워진 이들을 소설 형식으로 되살려낸다. 

표제작인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연작처럼 연결된 나머지 소설들을 한데 묶는 구심점이 되는 작품이자, ‘퀴어로 다시 써내려간 계보’라는 소설집 전체의 주제의식을 가장 집약하고 있는 단편이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ㆍ한정현 지음ㆍ민음사 발행ㆍ356쪽ㆍ1만3,000원

소녀 연예인 이보나ㆍ한정현 지음ㆍ민음사 발행ㆍ356쪽ㆍ1만3,000원


경성 최고 권번을 졸업하고 동경 유학 후 귀국해 1대 만신이 된 할머니 유순옥. 집안의 유일한 남성으로 어머니 유순옥을 이어 2대 만신이자 대무녀가 되었지만 해방 후 빨치산이 내려오던 날 산 채로 땅에 묻힌 희, 일본에서 공부하던 중 강제로 조선으로 추방된 뒤 크로스드레싱 여성 국극 배우가 된 주희. 그리고 주희의 조카로 서울대 시위 중 총에 맞아 사망한 트랜스젠더 대학생 제인까지. ‘계보’는 커녕 '존재'조차 지워져온 성소수자들을 빛나는 재능과 정체성을 이어가는 이들로 그려낸다.

일제강점기부터 현대 한국까지, 광화문에서부터 뉴욕까지. 확대된 시공간 속에서도 모든 등장인물들은 소수자들이다.  동성 연인과 트렌스젠더, 이민자와 비혼모, 미국의 여공과 기지촌 여성, 혼혈아와 입양아, 주한미군과 흑인, 조선적 재일인과 군 위안부 등.

국가와 민족, 이념과 젠더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 소수자들은 여섯 편의 소설에서 때로는 중심 인물로, 때로는 주변 인물로 등장하며 서로 연대한다. 그리고 이들의 개인적 삶 위에 일제강점기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1996년 연세대 여총학생회 사건과 노동권 보장을 외치는 여성 조합원들의 나체 시위 등 한국 근현대사의 ‘사건’들이 얹혀지면서 이들 소수자들은 주변부에 머누는 게 아니라 역사 한가운데로 전진한다.


한정현 소설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정현 소설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책 뒤에는 참고문헌 목록이 빼곡하다. 경성의 건축가들을 다룬 책에서부터 권혁태 등 성공회대 연구팀이 쓴 '주권의 야만 : 밀항, 수용소, 재일조선인' 같은 묵직한 학술서까지, 문헌의 목록만 훑어도 작가가 뭘 쓰고자 하는 지가 읽힌다. 실제 한 작가는 소설가이면서 현재 대학에서 한국문학과 문화사를 연구하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때문에 소설에서는 비평가나 연구자, 소설가나 다큐멘터리 감독 등 ‘기록’의 책무를 지닌 이들이 화자로 곧잘 등장한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소설들은 때로 문화사 논문 요약본처럼 읽힌다. 조밀한 역사적 설정과 다양한 인물이 넘쳐나지만 이들이 굴곡진 사연이 단편 하나하나에 빼곡히 모여있는 탓에 주의 깊게 따라 읽지 않으면 자칫 소설 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 100년에 걸쳐 흩뿌려진 문화사의 단서를 하나씩 주워담는 데만도 꽤 많은 집중력이 쓰인다. 하지만 결국 소설의 역할 중 하나가 잊힌 얼굴과 이름으로 다시 쓰는 미시사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이 소설가/연구자 덕분에 ‘소녀’와 ‘연예인’과 ‘퀴어’의 얼굴로 이뤄진 또 하나의 소설/문화사를 갖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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