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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카페가 문을 닫았다

입력
2020.07.07 16:00
수정
2020.07.07 17:56
25면
0 0
최성용
최성용작가
코로나19로 서울 마포구 서교동 일대 폐업한 가게. 서재훈 기자

코로나19로 서울 마포구 서교동 일대 폐업한 가게. 서재훈 기자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한다. 요즘 도시에는 이웃 간에 정이 없다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산다고. 나도 그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했었다. 직장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동네 사람들을 하나둘씩 알게 됐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이웃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풋내기 주민인 나를 동네 안으로 끌어들여 준 결정적인 장소들이 있었다. 3층 카페도 그중 하나였다.

5년 전, 오랫동안 비어 있던 동네 상가 3층에 카페가 문을 열었다. 당시는 기존 카페들도 오늘내일 하던 시절이라, 길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상가 3층에 카페를 연 사장님의 용기가 딱했다. 상가 앞을 지날 때마다 혀만 차던 시간이 좀 흐른 후, 글을 쓸 공간을 찾다가 구경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3층 카페에 갔다. 차분한 공간에,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아무도 없는’ 카페에 사장님 홀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순간 난 이곳이 내 작업실로 적격임을 알아차렸다.

그날 이후, 매일 아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준 다음, 카페로 출근을 했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 탄내가 조금 나는 진한 커피를 마시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글을 썼다. 그렇게 두세 달을 잘 지냈다. 나에게는 최고의 작업실이었지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금방 문을 닫겠는걸.’

다행히 동네 사람들도 하나둘 3층 카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특히나 어린 아기를 데리고 혼자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도 없는 카페가 글 쓰기 좋았던 것처럼, 어떤 남자 한 명만 있는 카페가 아이 데리고 오기 좋다고 생각했나 보다. 사장님은 젊은 엄마들하고 잘 어울렸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아이를 카운터로 데리고 가 돌봐주기도 했다. 손님들이 너무 사장님을 부려먹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사장님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손님이 늘어났다.

아이를 데리고 온 손님들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친구를 데리고 왔고, 친구의 친구들끼리 또 친구가 됐다. 아이들은 엄마들 사이를 오갔다. 누군가와 약속을 하지 않아도, 3층 카페에 오면 아는 동네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카페에 들어서면서부터 카페에 먼저 와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했고, 테이블을 옮겨가며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 다른 테이블이 합쳐지기도 했다. 그렇게 3층 카페는 동네 사람들의 아지트가 되어 갔다.

난 행여나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들이 나를 신경 쓸까 봐 이어폰을 낀 채 그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엄마들도 일하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내가 늘 앉는 자리는 언제나 비워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따라 모든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고, 다시 고개를 돌려 내가 늘 앉는 자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표시를 낸 그날 이후 목례를 나누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말을 거는 사람도 생겼다.

“지율이는 요즘 잘 지내나요?” 난 한번도 그들에게 내가 지율이 아빠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제주 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난 한번도 그들에게 제주 여행을 갔다고 말한 적이 없다. “한국일보에 칼럼 나온 것 잘 읽었어요. 깜짝 놀랐어요.” 난 한 번도 그들에게 내가 칼럼을 쓴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그들은 카페 한구석에 홀로 앉아 있는 젊은 남자를 동네 사람으로 만들었다. 내 아이가 카페에 들어서면 다들 인사를 했고, 동네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사이, 시끄러운 3층 카페에서 두 권의 책을 썼다.

5년이 지나면서 동네 카페는 어느새 세 배로 늘어났다. 그리고 나와 인사를 나누던 젊은 엄마들 중 상당수는 ‘2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동네를 떠났다. 최근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카페에 손님이 더 줄어들었다. 나도 아이가 학교에 안 가는 날이 길어지면서 카페에 가는 일이 뜸해졌다. 일주일 전, 오랜만에 카페를 갔을 때 사장님이 더치커피 한 병을 건네주면서 말을 꺼냈다. “못 보고 가나 걱정했어요. 이번 주 토요일까지만 장사를 하려고요.” “그럼 난 어디로 가란 말이에요.” 폐업을 말하는 사장님을 앞에 두고 나 어디로 가냐는 하소연이라니. 카페 사장님은 “그러게요. 어떡하죠?”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마지막 영업일 아침, 온 가족이 카페를 찾았다. 우리 가족은 그 카페에 가면 늘 그랬던 것처럼 한참 동안 책을 읽고 왔다. 그리고 사장님께 3층 카페가 나의 삶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말씀드렸다. 안타깝게도 카페에서의 마지막 시간 동안, 처음 이 카페를 왔을 때처럼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떠난 시간에 더 많은 단골손님이 카페를 찾았기를. 그렇게 동네 사람들의 좋은 아지트였던 카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단골 카페가 문을 닫은 지금, 난 동네를 방황하고 있다. 다시 새로운 곳을 찾겠지만, 정을 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최성용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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