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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자이니치

입력
2020.07.08 04:30
수정
2020.07.08 10:24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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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삶 속에서 싹튼 디아스포라의 문화

오사카 츠루하시에 있는 자이니치 상점가. ‘한류 붐’이 일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서 한국풍 식문화가 싹트고 사랑받는 배경에는 디아스포라로 살아 온 고된 역사가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오사카 츠루하시에 있는 자이니치 상점가. ‘한류 붐’이 일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서 한국풍 식문화가 싹트고 사랑받는 배경에는 디아스포라로 살아 온 고된 역사가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같은 일본 다른 일본 <15> 


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자이니치’

유창한 일본어나 조신한 몸가짐이며 어디로 보나 전형적인 일본인 여성으로 보이는 친구가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정보기술(IT)업종에서 일하는 성실한 사회인이다. 한류 드라마 팬보다 한국어 실력은 서투르고, 일상적으로 K팝을 흥얼대는 일본의 대학생보다 한국의 대중 문화에 어둡다. 하지만 그녀는 대한민국 여권으로 신분을 증명하는 한국 국민이다. 일상 생활에서 숱하게 차별을 당해 일본 사회에 거부감이 있지만, 사실은 한국도 먼 나라처럼 낯설다. 한국과 일본, 어느 쪽의 사회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그녀같은 ‘자이니치(在日, 8.15해방 이후 일본에 남은 한국인과 북한 국적의 조선인을 아울러 부르는 일본말)’ 인구가 50만명에 육박한다.

그녀와의 우정은 지난 2017년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이등 시민’인 그녀에게도 재외 국민으로서 한 표를 행사할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배포되는 선거 자료는 한국어 일색이어서 이해할 수 없었다. 대통령 후보가 어떤 이인지, 어떤 공약을 내걸었는지 자세하게 알고 싶었던 그녀가 먼저 만남을 청했다. 애국 정서가 뿌리깊은 한국에서는 ‘한국어도 모르면서 무슨 한국인이냐’ 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반 세기가 넘는 세월을 일본과 한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주변인으로 살아왔다. 그 복잡한 삶의 궤적을 일방적인 잣대로 멋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고향을 떠난 삶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흩어지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단어는, 원래 기원전 바빌론에 유배된 뒤 예루살렘에 귀향하지 못하고 전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게 된 유대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금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떠도는 신세의 사람을 폭넓게 지칭한다. 2,000년 전에는 타향을 떠도는 유대인들이 더없이 처량했지만, 지금은 고향을 떠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다르다. 바다 건너 먼 나라로 이민을 가서 잘 산다는 이야기가 흔하다. 제주도로 터전을 옮긴 연예인의 사생활은 동경심마저 불러 일으킨다. 현대인에게는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정착하는 것이 매력적이고 역동적인 삶의 한 방식이다.

하지만 모두가 낯선 땅에서의 삶을 동경하지는 않는다. 추방자나 망명자처럼 권력에 의해 쫓겨난 경우도 있지만, 우리 시대 디아스포라의 대다수는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등진 노동자나 난민이다. 할 일이 없어서 혹은 가족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고단하고 외로운 길을 선택한 이들이다. 1970년대 이후 이 단어의 쓰임새가 꾸준히 확대되고 있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떠도는 신세로 내몰린 사람이 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자이니치가 일본 땅에 남은 이유는 다양하다. 일본인과 인연을 맺고 가정을 꾸린 이도 있었다. 귀향할 경우 소지 가능한 재산이 엄격하게 한정되었기 때문에 힘겹게 꾸린 밑천을 포기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어렵사리 귀향했다가 전쟁 등으로 혼란한 한반도에 일자리가 없어 다시 일본행 밀항선에 탄 이도 적지 않았다. 한반도의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일본에 잔류한 이들의 3, 4세가 지금 자이니치의 주된 층이다. 차별의 무게를 덜기 위해 일본 국적을 취득한 이도 있고, 일본 문화가 더 익숙하다는 이질감을 감내하면서 한국 국적을 고수한 이도 있다. 국적은 본질적이지 않다. 이들은 심정적으로는 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도 온전히 귀속되지 않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묵묵히 살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의 타깃이 되는 자이니치

지난 주 일본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다. 큰 부동산 업체에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자이니치 3세 여성이 2015년 한국인에 대한 혐오 표현을 담은 문서를 되풀이해서 배포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일 이 소송에 대한 오사카 지방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는데, 사회적 허용 범위를 넘어선 차별적 표현으로 인격권을 침해한 혐의를 인정하고 소송 당사자에게 110만엔, 우리 돈으로 1,200여만원을 배상할 것을 명령했다. 일상 속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를 응징하는 판결이 내려진 것에 대해 자이니치 사회는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있어도 일본 사회의 자이니치에 대한 뿌리깊은 혐오 정서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극우 단체들의 ‘혐한 시위’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그만인 정치적 퍼포먼스와는 달리, 일상에 스며든 차별은 자이니치의 삶을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식민지 시대의 선조만큼 처절하지는 않아도, 이들의 삶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고달프다.

결혼 상대로 가족의 반대에 부딪히는 것도 다반사, 실력이 있어도 취업이나 승진에서 불리한 것은 당연지사다. 앞서 소개한 친구도 한 회사에서 20년 이상 일했지만 승진은 포기한 지 오래다. 자이니치의 입사 지원 서류를 배제하는 인사 담당자는 ‘면접에서 불합격될 경우 차별이 아니냐는 이의 제기가 올 수 있다. 이런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서류 전형에서 미리 불합격시킨다’고 변명한다. 업무상 불편이라는 것만큼 차별을 합리화 하기에 편리한 말이 없는 것이다. 학교에서 자녀가 본명 대신 일본식 이름을 쓰도록 부모가 배려하기도 한다. 부담스러운 시선은 피했지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부작용은 피할 수 없다.

코로나 사태에서도 차별적인 시선은 어김없이 불거졌다. 한 지방 자치 단체에서 관내 유치원에 감염 방지용 마스크를 무상 배포하면서 조선 학교 유치원만 제외했다가 논란이 일었다. 언론과 자이니치 단체의 항의가 잇따르자 마스크를 지급하기로 했지만, 이 과정에서 담당자의 ‘조선 학교에 마스크를 지급하면 부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차별적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자이니치의 손으로 쌓아 올린 디아스포라 문화에 대한 관심

‘자이니치에 대한 차별을 멈추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기에는 한국 사회도 떳떳하지 않다. 일본에 잔류한 동포 수십만 명이 극심한 생활고로 고통을 겪던 시절, 군사 정부는 이들을 ‘돈 때문에 조국을 등진 배신자’로 취급했고, 이들은 끊임없이 ‘북한의 간첩이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다. 과거 우리 정부가 이들을 동포로 감싸거나 일본 사회에서의 법적 지위 향상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적도 없다.

지금도 불편한 시선은 여전하다. 일본에서 유행하는 K팝이나 한일 역사 문제를 화제에 올릴 지 언정, 두 나라의 냉대 속에서 살아온 고된 사정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한국인이라며 왜 한국말을 못하냐’, ‘한국 문화는 얼마나 잘 아느냐’ 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일본 사회에는 융화될 수 없지만 한국 사회로부터도 줄곧 외면당한 자이니치에게 답변하기 거북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한류 붐’이 불기 훨씬 전부터 일본에서는 ‘기무치 (김치)’나 ‘야끼니꾸 (불고기)’ 등의 한식이 은근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호르몬 (ホルモン)’이나 ‘모츠 (モツ)’ 라는 이름의 소 곱창 요리도 인기 만점인데, 정육점에서 내다버린 내장 부위로 메뉴를 개발한 자이니치 주방장의 수완에서 비롯된 음식이다. 자이니치라는 정체성이 부담스럽던 시절이라 굳이 ‘한식’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지만, 재료나 양념 맛이 일식보다 한식에 가까운 식문화가 일본에서 널리 사랑받는 배경에는 이들의 고된 역사가 있었다.

자이니치의 문화적 정체성은 한국 문화도 일본 문화도 아닌 잡종적 속성에 있다. 국가의 제대로 된 보호를 받은 적 없는 이방인이 스스로 개척한 고독하고 모진 정체성이다. ‘한국 편이냐, 일본 편이냐’는 곤란한 질문을 던지기 보다는, 복잡하게 뒤엉킨 한일 관계 속에서 이들 디아스포라가 쌓아 올린 문화를 직시하고 가치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김경화 칸다외국어대 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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