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安市城), 1375년 전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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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安市城), 1375년 전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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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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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박성진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영화 '안시성' 스틸 이미지. NEW 제공


1444년, 세종은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 이유(李瑈)를 총재관(總裁官)으로 지명하고 정인지(鄭麟趾)를 중심으로 한 춘추관(春秋館) 및 집현전의 학사들을 총동원 하여 무신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지침서를 편찬하게 하였다. 그리고 1차 상정된 초고를 친히 수정한 뒤에 다시 학자들에게 내려 보내 역대의 논평과 주석을 첨부하게 하고 ‘역대병요(歷代兵要)’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 애석하게도 세종 자신은 책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1년 6개월 뒤, 1451년 음력 7월 12일 원고가 완성되었고 1456년 간행되었다.

‘역대병요’는 중국의 사례를 위주로 하였기에, 우리의 대외 전쟁은 주요한 24건의 사례만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이 음력 5월 17일인 관계로 눈에 띄는 기록이 있었다. 645년, 고구려 보장왕 4년 음력 5월 16일, 당나라 임금 이세민이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한 내용이다. 그 후 석 달간의 전투 결과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세민의 침략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지만, 아무래도 ‘역대병요’가 가장 풍부한 자료를 전한다고 본다. 침략 당시 이세민은 고구려의 방어책을 세 가지로 예상했는데, 고구려의 대로(對盧) 고정의는 경험 많은 장군인지라 묘책을 건의했다. 요지는 말갈족의 활용과 지구전의 혼용이었다. 내용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다만 지력은 딸리는데 자리는 높은 분이 용케도 일을 그르친다. 덕분에 이세민은 안시성까지 오게 되었다.

‘역대병요’는 여기서 송나라 범조우(范祖禹, 1041~1098)의 평론을 찾아왔다. “나라는 아무리 작더라도 얕볼 수 없다고 하였다. 작은 나라라도 지혜로운 자가 대책을 세우고 용감한 자가 목숨을 바친다면 온 천하의 막강한 힘과 백만 병력을 가지고도 그 나라를 이길 수가 없다. 고정의가 낸 계책은 이세민이 겁낸 최고의 계책이었다. 그 말대로 했다면 당나라가 어찌 위험하지 않았겠는가?” 찾아보니 ‘당감(唐鑑)’에 나온다. 

이세민이 안시성과 성주를 평가하는 대목은 ‘삼국사기’에서 따왔다.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지형이 험하고 군사가 강할 뿐만이 아니라, 그 성주는 지혜와 용기를 갖춘 인물이기에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도 성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고, 연개소문이 공격했지만 굴복시킬 수 없어서 안시성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곁에 있는 건안성은 병력이 약하고 군량미도 적다. 따라서 불시에 건안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자. 건안성이 항복하면 안시성은 이미 우리의 손 안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안시성은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성 가운데는 공격해서는 안 될 성도 있다’에 해당한다.”

다만 모두의 관심사인 안시성의 성주(城主)에 대해서는 ‘역대병요’ 편찬 당시까지 정설이 없었던 모양이다. ‘삼국사기’에 실린 김부식의 평론을 손질해서 옮겨 놓았을 뿐이다. “당 태종은 영명한 불세출의 임금이다. 국난을 평정한 공적은 탕왕과 무왕에 비교할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린 업적은 성왕이나 강왕과 비슷하였으며, 용병술로 말하면 전략이 무궁하여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었다. 다만 고구려를 침략 했을 때는 오랫동안 안시성을 포위하고 온갖 계책을 내어 공격했지만 끝내 승리하지 못했으니, 안시성주는 정말 비상한 인물이라 하겠다. 그러나 역사에 그의 이름 전하지 않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其城主亦可謂非常之士矣 惜乎史失其姓名也) 이로써 추측컨대 1456년까지 조선은 안시성주의 이름을 몰랐던 것 같다. 그러다가 윤근수(尹根壽1537~1616)가 왜란 때 온 중국인에게 들었다며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梁萬春)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한편 양만춘(楊萬春)이라고 쓰는 이도 생겼다. 

중국 포털에 ‘梁萬春’을 입력하니, 명나라 웅종곡(熊鍾谷, 1506~1578)의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 약칭 唐書演義)’에서 나오는 인명이며, 허구의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량(梁)을 양(楊)쓴 까닭은 한국의 두음법칙 때문이라 한다. 덧붙여 한국의 구축함에 ‘양만춘호’가 있다고 썼다. 떨떠름하지만, ‘연의’가 소설인 것은 맞다. 기실 조선시대에도 ‘양만춘’이 ‘안시성주’라는 설에 반대하는 학자가 많았다. 

남재철의 논문 ‘안시성주의 성명 양만춘 고증’를 보니, ‘당서연의’가 ‘양만춘’을 언급한 최초 문헌이며, 기타 가설은 근거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당서연의’는 명나라때 최종 편찬 된 책이지만 저본은 그 이전부터 내려 왔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신중한 태도로 글을 맺으며 저본의 성립 시기를 원나라로 추측해 본다고 했다. 매우 타당한 의견이다. 그럼에도 소설을 근거로 ‘양만춘’이 ‘안시성주’라고 하기는 아직 힘들다.

문득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는, 조선사를 저술한 바로 그 사람들 손에 없어졌다.”던 신채호 선생이 말씀이 떠오른다. 영광도 치욕도 낱낱이 기록해서 전해줘야 하지 않을까. 1375년 전, 세계 최강의 적군과 외롭게 싸워 이겼던 실명(失名)의 조상들을 생각한다. 

박성진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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