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지나가면 냉면 철이다. 아직도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냉면은 절절 끓는 아랫목에서 먹어야 제맛”이라는 신화가 있다. 원래 냉면 제철은 겨울이라는 뜻이다. 그 ‘신화’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는데 우선 메밀이 보통 늦가을에 수확된다는 사정이 컸다. 수확에 맞춰 겨울에 먹게 된다는 뜻이다. 더구나 냉면을 말자면 얼음 살살 끼어 가는 김치가 있어야 할 텐데 역시 겨울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더불어서 고명으로 제격인 돼지를 잡거나 육수에 보태기 좋은 꿩 사냥은 아무래도 겨울에 쉬웠던 까닭이리라. 얼음 공장이 없거나, 있더라도 구하기 어려웠을 옛날의 이야기다. 그런 배경이 있어서인지 여전히 겨울 냉면집에는 ‘(냉면 육수가 시려서) 이를 딱딱 부딪쳐 가며’ 먹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형편이 어찌 되었든 냉면은 이미 여름 시식이 된 지 오래다. 더울 때 시원할 걸 찾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니. 겨울이 제철이라 아무리 외친들 사먹는 이가 드문 장사를 이어가기는 어렵다. 대구에서 오랫동안 냉면을 해온 집은 아예 날이 추워지면 문을 닫는다. 서울시내 냉면집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두 계절 간에 매출이 열 배, 스무 배 이상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간단히 말하면, 겨울에는 개점휴업이다.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여름에 평양냉면 안 먹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듯 화제가 되어서 길게 줄을 선다. 어찌된 영문인지 몇몇 가업의 비밀로 여겨지던 평양냉면집이 두서없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 하다못해 이북 출신 당숙이라도 있어야 전통 있고 제대로 면을 뽑는다고 생각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인터넷에서는 아예 ‘신흥 평양냉면집’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의 새 냉면집들을 품평하는 글이 올라오고, 밀면의 아성이 워낙 두꺼워서 맥을 못 춘다는 부산에도 평양식 냉면집이 생겼다. 남북대화로 옥류관 냉면이 판문점에 배달되고, 평양에 공연 갔던 걸그룹 멤버의 냉면 시식담이 화제가 되었던 몇 해 전처럼, 올해는 어떤 냉면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하다.
서울에서는 한여름에 냉면이라고 꼭 평양식만 먹어온 것은 아니었다. 냉국수도 있었고, 냉면보다 훨씬 오랜 전통의 콩국수도 냉면인 셈이고 중국집 냉면도 있었다. 중국집 메뉴는 원래 찬 메뉴가 아주 드물다. 국물 있는 중국 냉면도 매출이 빠지는 여름에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한국식 아이디어다. 그것도 이미 하나의 전통이 되어서, 땅콩소스 뿌리고 해파리에 새우 얹은 중국 냉면의 맛도 혀에 삼삼하다. 한데 내 기억에는 대구의 어느 오래된 화교 중국집에서 먹은 ‘오리지널’ 냉면이 있다. 간반면이라거나, 량반면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비빔면인데 대구의 전통 구도심인 ‘종로’의 중국집에서 팔곤 했다. 거기에 들어가는 양념이 가죽나물 절임이다. 봄에 많이 나오는 가죽나물에 소금을 듬뿍 쳐서 절여 두었다가 쓴다. 서울의 연희동에서도 몇몇 화교 중국집에서 냉면에 이걸 쓰고 있다. 쌉쌀한 향이 일품인데, 중국요리에서 전통적으로 볶음 요리에도 많이 쓰는 양념이다. 이게 여름 비빔면이나 냉면에 들어가면 입맛을 돋워주는 비밀 재료가 된다. 원래 쓰고 짠맛은 입맛을 돋우는 법인데, 가죽나물이 그 몫을 제대로 한다. 지난 봄에, 가죽나물이 많이 나왔길래 몇 다발 사서 중국식으로 소금에 절여 두었다. 마침 냉면철이 되었으니 이놈을 꺼내서 향과 맛을 보았다. 아, 이거구나. 알싸하고 씁쓸한 특유의 향이 올라온다. 봉지 냉면을 사다가 이놈을 얹었다. 입맛이 확 돈다. 올해 서울 냉면 세상에는, 중국식 냉면도 한 자리 단단히 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름에 분식집의 인기 메뉴였던 쫄면도 한 자리 드리고, 얼음 조각과 토마토, 오이채 얹은 빨간 비빔국수도 어찌 냉면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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