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 와인 만들다 실수로 탄생?
지금은 캘리포니아 대표 와인
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한국일보>
엄마는 돌아가시기 두 달 전쯤부터 대소변이 자유롭지 못했다. 몸이 불편하다 보니 자연히 몸에 묻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를 모시고 사는 오빠 부부는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터라 엄마의 심리는 물론 분비물을 늘 깨끗하게 처리했다. 특히 냄새 관리에 신경을 썼다.
매주 주말이면 꽃을 들고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 귓가에 “엄마 사랑해. 엄마 고마워”라고 말할 때면 엄마에게선 향긋한 냄새가 났다. 엄마가 오래전부터 사용한 비누 냄새로, 물에 뜬다고 알려진 아이보리 비누 향이었다.
얼마 전 사무실에 비누가 떨어져 비누를 사러 갔다. 비누 코너에서 서성거리던 필자는 나도 모르게 그 비누를 집어 들었다. 손을 씻을 때마다 비누향이 퍼지며 엄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엄마는 그렇게 비누 냄새를 남기고 세상을 뜨셨다.
필자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엄마에게서 아이보리 비누에 관해 들은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이를 사례로 든 책도 있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다. 아는 분도 있겠으나, 사실 그 비누는 불량품이었다. 비누를 만들 때는 여러 원료를 비율에 맞게 배합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기계로 원료를 배합하지만, 아이보리 비누가 나올 당시만 해도 사람이 지키고 서서 기계가 원료를 잘 배합하는지를 살펴야 했다.
어느 날 기계 담당자가 점심을 먹고 돌아와 보니,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 데 기계가 저 혼자 돌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 만들어진 비누에는 원료가 혼합되면서 공기까지 들어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잘못 만들어진 비누는 물에 가라앉지 않고 둥둥 떠올랐다. 비누 회사는 불량 비누를 폐기하려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시중에 풀었다.
소비자의 반응은 예상외로 뜨거웠다. 그 뒤로 비누 회사는 ‘물에 뜬다’는 점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곧 아이보리 비누는 그 회사의 주력 상품이 되었다. 발상의 전환이 가져다준 뜻밖의 선물인 셈이다.
아이보리 비누처럼 불량품이었지만 큰 성공을 거둔 제품이 꽤 있다. 포스트잇이 대표적이다. 접착력이 약하고 끈적거리지 않는 접착제를 ‘실수로’ 만든 탓에, 지금은 어딜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문구가 탄생했다. 비아그라도 비슷하다. 협심증 치료약으로 개발되었으나 임상 과정에서 지금의 효과에 탁월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또한 대박이었다. 냉면을 만들다 실수로 굵은 면발을 뽑아내 탄생한 쫄면도 마찬가지다.
실수로 탄생한 불량 와인의 반전
와인의 역사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미국에서 생산하는 ‘화이트 진판델’이란 와인이 그것이다. 와인 이름 앞에 ‘화이트’가 붙어 있어 화이트와인이라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이 와인은 달콤한 맛의 핑크빛이 도는 로제와인이다.
미국 와인 하면, 대개는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나파밸리의 카베르네소비뇽으로 만든 레드와인과 샤도네이로 만든 화이트와인을 떠올린다. 그런데 현지에서는 레드와인 품종인 진판델로 만든 와인이 인기가 좋다고 한다. 그 가운데 역시 동일한 진판델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진판델이 가장 많이 팔린단다. 바로 이 화이트 진판델에 얽힌 ‘실수담’으로, 1970년대 미국의 셔터 홈 와이너리(Sutter Home Winery)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이 와이너리에서는 진판델 품종으로 하나의 라인에서 두 종류의 와인을 만들었다. 하나는 드라이(달지 않은)한 맛의 로제와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레드와인이었다. 그런데 한 품종으로 한 라인에서 어떻게 두 종류의 와인을 만들까. 방법은 이렇다.
으깬 포도를 통에 넣고 짧은 시간 동안 우러나온 소량의 포도즙을 다른 통에 따라낸다. 따라낸 포도즙은 연한 핑크색을 띤다. 포도 껍질에서 색깔이 조금만 우러났기 때문이다. 반면 통에 남은 포도즙은 점점 더 진한 붉은색으로 변한다. 핑크색 포도즙을 따라낸 만큼 전체 포도즙의 양이 줄었기 때문에, 포도 껍질에서 우러나는 색과 향이 상대적으로 더 많아져 농축된 덕분이다. 이렇게 얻은 핑크색 포도즙으로는 로제와인을 만들고, 통에 남은 진한 붉은색 포도즙으로는 레드와인을 만들었다. 이 양조법을 세니에(Saignee) 방식이라 한다.
사실 세니에 방식은 색과 향과 맛이 더욱 진한 레드와인을 만들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말하자면 진한 레드와인을 만드는 것이 주목적이다. 로제와인은 그 과정에 얻어지는 일종의 부산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로제와인은 색이 연하고 타닌이 적어 상큼했다. 과일 맛이 풍부해 맛도 있어서 와이너리의 부가 매출을 올려주었다.
그날, 예의 실수담이 탄생한 날에도 셔터 홈 와이너리에서는 두 번 나누어 얻은 포도즙으로 로제와인과 레드와인을 만들었다. 그런데 로제와인을 만들던 중 발효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 발효는 효모가 작용해 포도즙의 당분을 알코올로 바꾸는 과정이다. 그날은 효모가 활동을 중단(Stuck fermentation)한 탓에 당분이 알코올로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 당연히 의도한 알코올 도수에 이르지 못했다. 게다가 알코올로 바뀌지 않은 당분이 남아 있으니 맛은 달달했다.
낭패였다. 셔터 홈 와이너리의 로제와인은 드라이한 맛으로 소비자에게 어필해온 터라, 시장에 내보내봤자 팔리지 않을 게 뻔했다. 할 수 없이 불량품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다 미련이 남은 제조 담당자가 한쪽에 치워둔 불량 와인을 맛보았다. 그런데 기존 드라이 와인보다 맛이 더 나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곧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맛보였다. 그들의 반응도 가히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하는 마음으로 달콤한 불량 로제와인을 시장에 내보내기로 했다. 그러자 불량 로제와인은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그야말로 뜨거운 호응 속에 대박을 쳤다.
사람의 입맛은 역시 달콤한 맛을 선호하는가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불량 와인의 매출은 셔터 홈 와이너리의 주력 상품인 레드와인의 매출을 뛰어넘더니, 마침내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셔터 홈 와이너리에서는 이 와인의 색이 투명한 빛에 가까운 핑크색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름을 ‘화이트 진판델’이라 붙였다. 화이트 진판델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자 캘리포니아의 다른 와이너리들에서도 화이트 진판델을 만들어 출시했다. 마치 바바리코트처럼 화이트 진판델은 어느새 와인의 한 스타일이 되었고 보통명사가 되었다. 가히 백조가 된 미운 오리 새끼의 와인 버전이라 할 만하다.
현재 화이트 진판델은 세니에 방식으로도 만들지만, 대부분은 침용 방식(Maceration Method) 즉, 으깬 포도를 발효통에 넣고, 짧은 시간(6시간에서 48시간) 동안 껍질에서 색을 우려낸 뒤 즙과 껍질을 분리해 만든다. 물론 잔여 당분을 남긴 상태에서 발효를 중단시켜 알코올 도수가 낮으면서도 달콤한 맛은 유지한다. 최근엔 스파클링 화이트 진판델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대표 품종이 된 진판델 포도나무
화이트 진판델에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처음 출시되었을 때 한동안 사람들은 화이트 진판델을 ‘카베르네 블랑’ ‘화이트 카베르네’라고 불렀단다. 진판델 품종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은 카베르네소비뇽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더 고급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으리라 짐작한다. 실제로 당시 와인 전문가와 평론가는 진판델로 만든 레드와인에 인색할 정도로 낮은 점수를 매겼다. 이들에게 진판델은 중저가 레드와인용 품종일 뿐이었다. 와이너리에서도 진판델로는 고급 와인을 만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화이트 진판델이 워낙 인기 있었기 때문에, 와이너리에서 진판델 품종을 카베르네소비뇽 품종으로 교체하지 않았다. 만약 화이트 진판델을 사람들이 그토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진판델 품종은 캘리포니아의 포도밭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때 진판델은 미국 토종 품종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출신이 불분명했다. 다만 1820년대에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품종이라고만 알려졌다. 그러다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덕분에 2002년에는 마침내 진판델의 고향과 정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진판델의 DNA를 분석해보니, 진판델은 크로아티아의 레드와인 품종인 츠를레나크 카슈텔란스키와 이탈리아 풀리아 지방에서 자라는 프리미티보와 같은 계열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귤화위지(橘化爲枳),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진판델 품종은 마치 미국 토박이라는 듯, 캘리포니아의 테루아르에 완벽하게 적응해 캘리포니아 대표 품종이 되었다. 화이트 진판델 덕분에 살아남은 진판델 품종 포도나무는 어느덧 고목이 되었고, 최근 와인 평론가나 전문가들에게 재평가되고 있다. V.V(Vieilles Vignes)라고도 부르는 ‘나이 든 진판델’은 레드와인용 포도로서 가능성을 보이더니, 캘리포니아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풀리아에서도 올드 바인 진판델(Old Vine Zinfandel)이란 이름의 프리미엄급 와인으로 생산된다.
로제와인 이야기를 하는 김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화이트 진판델처럼 색이 옅은 로제와인을 보통 블러시 와인(Blush Wine)이라고 부른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수줍게 물든 청춘의 뺨 색깔 같기도 하고, 볼터치로 살짝 색을 낸 볼 같기도 하다고 붙은 이름이다. 참고로 로제와인은 나라에 따라 산지에 따라서도 이름이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말 그대로 로제(Rose)라 부른다. 이탈리아에서는 로사토(Rosato), 스페인에서는 로사도(Rosado), 독일에서는 바이스헵스트(Weissherbst)라고 부른다.
아무튼 실수로 빚어진 화이트 진판델은 한낱 불량 와인에서 살아남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더니 인기 와인으로 거듭났다. 진판델 품종을 살린 것은 물론 프리미엄급 레드와인까지 탄생시켰다. 미운 오리 새끼가 실은 백조였듯이, 회수를 건넌 건 귤이 아니라 애초부터 귤보다 맛있는 탱자가 아니었을까.
화이트 진판델은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매력적이다. 가격마저 착한 데다가 필자의 식성처럼 음식을 가리지도 않아 달콤 짭짤 새콤 매콤한 다양한 음식과도 잘 맞는다니, 필자하고도 잘 어울리리라. 게다가 올여름은 무척 더울 거라는데, 날씨 예보가 아니더라도 잠깐이라도 나서면 충분히 더운 줄을 알겠다. 마스크까지 써야 하니 볼이 저절로 발그레하게 달아오른다. 그러니 얼음에서 막 건져낸 시원한 블러시 와인이 생각날 밖에!
책상을 정리하고 비누로 손을 씻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익숙하고 그리운 비누 냄새가 내 몸에서 훅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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