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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불가에 내놓은 아이가 되었다

입력
2020.07.01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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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물가의 아이와 불가의 아이

편집자주

독창적 문체로 남성 패션지 ‘GQ’를 18년간 이끌어온 이충걸 전 GQ 편집장이 문화 현상의 이면을 새롭게 들춰 봅니다. 현재 서울 필동에 사는 이 전 편집장의 ‘멘션(mentionㆍ촌평)’은 격주 수요일자 <한국일보> 에 실립니다


2007년 개봉했던 영화 '도쿄타워'는 암에 걸린 엄마와 함께 사는 아들의 삶을 그렸다.? 엔케이컨텐츠 제공

2007년 개봉했던 영화 '도쿄타워'는 암에 걸린 엄마와 함께 사는 아들의 삶을 그렸다.? 엔케이컨텐츠 제공


나도 인생이 유한하다는 건 안다. 세상에 그것만큼 분명한 진실이 없다는 것도. 그러니까 엄마도 돌아가실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나에게 윤곽이 흐릿한 추상이며 상실의 희미한 감각일 뿐이었다. 적어도 사월까지는 그랬다.

오월. 어둠이 더디게 오는 계절이 오자 뭔가 임박했다는 구체적 실감이 들었다. 아무리 엄마와 평생을 같이 살았고, 필요한 추억은 다 여기 있으며, 그 사랑은 깨질 수 없다고 믿는다 해도 끔찍한 틈을 벌리는 상실감이.

아침마다 엄마는 식탁에 앉아 집과 면한 공원의 나무를 관찰했다. 여름에 그늘을 만들고 겨울에는 방어벽이 되어주는 나무를. “나무 이파리가 꼼짝도 하지 않네. 바람이 한 점도 없다.” 창문 곁에서 보내는 엄마의 세월은 매일 불어났다.

이상하게 윙윙 날아다니는 새들은 날개가 보이지 않았다. 날개를 너무 빨리 움직이는 걸까? 아님 나무의 작은 구멍을 부리로 찍는 딱따구리 과일까? 새들이 나무에서 얼굴을 뗀 자리에 혹시 금색 튤립이 피어나지 않을까? 몽상가의 눈꺼풀에 벌꿀처럼 달달한 졸음이 덮일 때 엄마는 급속도로 시들었다.

그동안 엄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이른 시간, 엄마의 호출 벨이 울리면 전날의 숙취 속에서 계란찜에 얼굴을 파묻지만 언젠가부터 엄마는 먹는 것에 뜻이 없었다. 배도 안 고프고 만두만큼 먹고도 배 부르다고 했다. 그날은 유독 달랐다. 어지럽다면서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 숨을 몰아 쉬는데 피부는 벗겨질 듯 헐거워 보였고, 호소도 부탁도 담기지 않은 눈은 다만 침울해 보였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수천 가지였다. 선로에서 벗어나 싱크 홀에 빠졌다고 느낀 순간, 북촌 사는 친구가 차를 몰고 왔다. 우리는 엄마를 거의 손으로 뜨듯이 차에 싣고는 그녀 아들이 다니던, 어른 환자도 많은 소아과에 갔다. 

엄마가 링거를 맞는 동안 나는 엄마 원숭이와 떨어져 불안해하며 구석진 곳을 찾는 아기 원숭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매일 무너져가는 기초 공사를 점검하듯 살폈지만 엄마의 푸르른 빛은 황폐한 나무 껍질 색으로 변했다. 나는 책임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문제와 직면하는 법을 몰랐다. 나에게 일어난 일도 남 일처럼 괴상한 피상성으로 대했다. 나는 점잖은 성인 남자처럼 행동할 수도 없는 어린 아이니까.  

그날 형제들 단톡방에 적었다. “엄마가 우리 곁에 계실 날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이제부터는 형제들이 다른 각오로 돌보아 드려야 돼.” 나는 엄마 상태에 맞춘 약들을 요리조리 살펴서 한 아름 주문했다. 그러나 엄마가 지병에 반드시 먹어야 할 약이 열두 광주리나 남은 걸 보자 서운함과 미움이 토네이도를 일으켰다.

게다가 엄마는 내 맘대로 ‘처방’한 영양 보조제를 “하나, 둘, 셋… “ 여덟까지 세고는 너무 많다고 불평했다. 나는 매번 달래야 했다. “성경에도 나오잖아.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겠냐고. 내가 설마 해로운 걸 주겠어?” 밥 안 먹겠다는 일곱 살 아이를 밥숟갈 들고 쫓아다니는 초보 부모처럼, 아니, 의욕 저하 중학생을 어떡해서든 일으키려는 서툰 아빠처럼. 한 바탕 전쟁을 치른 엄마가 피곤하다고 방에 올라가면 나는 혼자 쓴 커피를 내렸다.


서로를 돌보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묘사한 영화 '도쿄타워'의 한 장면. 엔케티컨텐츠 제공

서로를 돌보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묘사한 영화 '도쿄타워'의 한 장면. 엔케티컨텐츠 제공


텔레비전이 텅빈 화면을 내보낼 때 자꾸 옛날 생각이 났다. 엄마의 용맹스러운 맥박과 주시할 수밖에 없는 태연함, 그 암묵적인 자긍심이. “나는 태산도 옮길 자신이 있었어. 호랑이도 무섭지 않았어. 배추 백 포기도.”

그러나 2년 전 외가 식구들과 속초 별장에 다녀오시곤 “이 여행은 이제 마지막인 것 같아”라고 속삭였다. 그 세월, 자신을 날게 해주었다고 믿었던 날개를 놓아버린 듯이. 작년엔 심장 스텐트 재수술 여부를 판단하는 검사를 위해 잠깐 입원했는데 그때도 “아무래도 이번에 수술실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올 것 같아”라고 말했다. 마치 삶의 회고를 끝낸 사람처럼. “왜 그런 말을 해? 무섭게….” 나는 스무 살 넘어선 엄마 앞에서 딱 한 번 울었는데, 그날은 당장 빨개진 눈이 창피해서 휴지로 얼른 닦았다.

친구들은 말했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당신의 마지막을 준비하시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형 곁을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의 연습을 해야 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폐가 구겨질 것 같았다. 엄마는 아브라함 시대의 무드셀라가 아니지만 누가 오백 살이 넘었다 한들 생명은 그렇게 맥없이 사라지면 안되었다.

나는 아침 밥상머리에서 엄마에게 일본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엄마는 지푸라기 같다가도 그때만 되면 투포환 선수처럼 씩씩해졌다. 처음 배운 일본어는 “작은 토마토가 맛이 있어요”와 “개미들이 태양 아래 줄지어 가고 있어요”였다.

두번째 날은 문장이 길었다. “내가 약을 너무 많이 먹었어요. 배가 부르고 불러서 종이 풍선처럼 부풀었어요. 그래서 이제 방에 자러 가요”였다. 어제는 두 문장, “우리 아들이 있어서 엄마는 진짜 행복해”와 “물 가지고 와”였다. 부탁할 때의 존칭 비존칭 용례에 대해서도 배웠다. 

아침은 평화로운 만큼 위태로웠다. 엄마의 식습관을 도저히 고칠 수 없었다. 엄마는 라면을 너무 좋아해서 “한 달에 한 번”이라고 못박았지만, 글을 쓰는 오후엔 라면 냄새가 수시로 3층까지 올라왔다. 라면 냄새는 강철보다 강인하고 바늘보다 집요했다.

난간에 부딪치며 부엌으로 달려 내려가면 엄마는 달걀도 넣지 않은 라면을 접시에 받쳐 드셨다.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나는 단단하게 팔짱을 꼈지만 머릿속에 어떤 감정이 지나갔는지 몰랐다. 불건강을 알면서 줄이겠다는 약속만 하는 엄마의 이분법적 시스템에는 “라면 말고는 다 싫어”밖에 없었다. 엄마는 한 달에 한 개만 먹겠다고 다시 손가락을 걸었다.

사흘 뒤 라면 냄새가 다시 올라오자 내 입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내가 엄마 몸 나아지게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런 식이면 모든 게 한 번에 물거품이야!” 엄마의 무응답은 나를 좌절하게 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도 못할 거면서 맹세하는 것이 펑크 혹은 인생 아닌가.

부모는 항상 자녀가 그들 인생의 정중앙에 있고, 자기들은 그 바깥 둘레에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 이유로 스스로를 방치해도 괜찮은가? 이런 독립성은 보호받아야 하나? 나는 서랍 속의 라면을 죄다 꺼냈다. “그거 다 갖고 어딜 가?” 엄마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나를 소리로 붙잡았지만 나도 지지 않았다. “버릴 거야. 엄마가 약속을 안 지켰기 때문에.”

나는 엄마와 나를 잇는 감정이 죄책감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죄책감은 우리 관계의 본성이 된 지 오래였다. 나는 매일 자문했다. 엄마에게 필요한 건 애정과 보살핌일 텐데 내 방식을 이렇게 강요하는 게 맞을까? 어쩌면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걸까? 그렇게 하면 내가 생각한 진짜 어른이 될 것 같아서? 빗발치는 회색의 새벽 네 시엔 타협과 실망 사이를 오갔다.

너는 매일 술을 마시잖아. 술이 라면보다 몸에 좋아서? 네가 저녁마다 마시는 와인은 신성한 자유의 횃불이며 금지된 즐거움이야? 나는 다툼의 채널을 바꾸어서 채소가 많이 함유돼 있거나 칼로리가 낮은 라면을 주문했다.

반응은 같았다. “먹어보니 다 맛이 없다.” 내벽에 금이 간 내 마음은 막내 이모가 한 말 때문에 겨우 붙었다. “라면 먹고 기운 차리는 게, 라면 안 먹고 기운 없는 것보다 나아.” 엄마는 나더러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엄마는 불가에 내놓은 아이가 되었다. 프로이트가 누군지 엄마가 알 바 아니지만 엄마와 아들의 관계에는 딸과 다른 점이 있다는 이론은 올바를까? 나는 엄마에게서 본 모든 속성과 상징을 내 자신 안에 쌓아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전에 나는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 에둘러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엄마를 꼭 안고 “사랑해” 하고 말한다. 나는 엄마가 공허함이라는 절벽에서 붙잡을 나뭇가지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몸으로 나에 대한 불가능한 약속을 지켰구나, 모든 걸 놓쳐버린 마음으로. 그럴 때마다 엄마도 말했다. “나도.”

얼마 전 우리 집 루프트 탑에 데크를 만들었다. 좁은 계단으로 올라가 남산 타워를 보면 복도를 한참 지나서야 갑자기 나타나는 넓은 공간처럼 특별한 장소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북쪽에서 높은 바람이 불어오면 향긋한 나무 냄새로 온 몸이 촉촉해졌다.

엄마는 말했다. “너 이 집에서 다른 데로 이사 못 가겠다?” 그럴 리 없다고 말하지만 숨겼던 생각은 다른 소리를 했다. 엄마가 돌아가셔도 이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엄마가 있던 이층을 지나 계단으로 내려올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서울 길을 밟을 수도 없을 것이다. 엄마를 모시고 다닌 병원이 이곳저곳 하도 많아서. 


북쪽에서 높은 바람이 불어오면 향긋한 나무 냄새로 온 몸이 촉촉해졌다. 게티이미지뱅크

북쪽에서 높은 바람이 불어오면 향긋한 나무 냄새로 온 몸이 촉촉해졌다. 게티이미지뱅크


오늘밤엔 엄마가 5㎝ 나아진 몸으로 미국프로레슬링(WWE) 경기를 보고 있었다. 나는 엄마 옆에 앉았다. 

“밤에 먹는 약은 다 챙겨 먹었어?”  

“응. 다 먹었어.” 

“고마워.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갑자기 엄마 얼굴이 익살스럽게 변했다. 

“너 이번에 내가 죽을 줄 알았지? 비켜. 화면 안 보여.” 

나는 이번에도 엄마의 감정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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