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공공지출 확대 한목소리
재정악화 감수·증세 선택 불가피
국민경제역량의 지속 가능 장치 완비를
30년 전(1990년 8월) 경험이 일천한 소장학자 시절, 평민당 원내부총무를 맡고 있던 이해찬 의원으로부터 의원총회에서 '새해 예산안 심의 방향'을 주제로 강의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70석의 야당 의원들에게 입장을 밝힐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여 흔쾌히 응했었다. 나는 의원총회에서 “평민당이 국민 복지 증대를 외치면서 국민 조세 부담을 경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이율배반적 태도”라고 지적하면서 “오히려 평민당이 요구하는 국민 복지 증대에 상응하는 증세를 호소하거나 아니면 복지예산 증대 문제를 신중히 접근하는 것이 적어도 집권을 내다보는 책임정당의 자세”라고 강조했다. 그러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몇몇 의원들이 일어나 큰소리로 “우리 당론과 어긋나는 발언을 중단하라”라고 질책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그 순간 단상의 김대중 총재가 “조용히 하세요. 우리가 초청한 강사인데 끝까지 듣고 질의하도록 하세요”라며 장내를 정리했다.
사실 당시 야당 의원들이 정기국회 예산심의 시 이구동성으로 세입예산 삭감을 주장하는 분위기에서 증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증세가 필자의 소신이어서가 아니고 평민당이 주장하는 서민대책,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안전망 구축 등 소위 사회적 가치 증진을 위해서는 증세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평민당의 지지 기반을 승계한 180석 여당의 의원총회에서 '증세론'의 불가피성을 주장한다면 어떠한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
증세는 항상 강한 반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정치적 리스크가 큰 의제이기에 여야를 불문하고 증세 논의를 가급적 꺼리는 경향이 강하다.
그럼에도 이제 정치권은 증세 문제에 대한 중·장기적 입장을 분명히 정립해야 한다. 지난번 총선 과정에서 여야 공히 국민의 기본생활보장을 견고히 해야 한다는 공약을 제시했고, 다수의 유권자들 역시 정부의 적극적 역할에 순응하는 의식의 변화가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장경제의 긍정적 가치를 주도해 온 야권이 앞장서서 '기본소득' 개념의 도입을 주장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현재의 국민 정서가 분명히 '큰정부'와 '적극적 재정'의 흐름으로 익숙해져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행정부 역시 한국판 뉴딜정책 구상을 빈번히 밝히고 있음은 당분간 '효율적 정부'라는 신자유주의 정책기조의 입지가 협소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정치권이 정부 지출 확대로 귀결되는 국민적 기대 욕구를 기정사실로 인정한다면, 이에 소요되는 추가적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밝혀야 한다. 물론 일부 재정 관료들은 기존 정부 지출 구조의 재조정을 통해 추가적 재원 확보의 가능성을 열어두겠지만, 예견되는 자연 세수입의 감소 추이와 적극적 재정정책 구사를 감안하면 필연적으로 세수입 부족을 예견할 수 있다. 이러한 수입·지출의 불균형 상황에서 국민적 기대와 정치권의 언약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장기적 관점에서 국가채무 증대로 귀결되는 적자재정 기조의 심화를 감수하지 않는 한 증세 가능성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증세의 모색이나 적자재정 심화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복지 지출 확대와 적극적 재정정책의 구사라는 정치적 구호는 '말의 잔치'에 그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재정 현실을 냉철히 분석하고, 어떤 정책 기조로 끌고 나가는 것이 국민경제 역량의 지속 가능성을 확립하는데 상대적으로 바람직한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만일 증세가 불가피한 선택이라면 여당과 행정부가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가능한 정책 기조를 제시하고 국회가 공론화 과정에 들어가야 한다.
책임여당은 최저국민생활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재정지출 확대가 추가 세 부담이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을 능가한다는 믿음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 형성에 주력함으로써 증세 노력이 초래하는 정치적 부담을 감내해야 한다. 규제 혁파를 통해 경제 활동을 진작하면서 경제적 여유계층이 추가적 세금 부담을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전방위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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