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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전태일을 거쳐 삶의 바다로… 박경리의 말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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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전태일을 거쳐 삶의 바다로… 박경리의 말은 흐른다

입력
2020.06.26 04: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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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토지’ 30년 연구자 김연숙
소설 속 문장을 '화두' 삼아 삶을 반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TV드라마로도 여러 번 각색됐다. 2004년 SBS 방영 버전에서 서희 역을 맡은 김현주(왼쪽)가 열연하고 있다. SBS 제공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TV드라마로도 여러 번 각색됐다. 2004년 SBS 방영 버전에서 서희 역을 맡은 김현주(왼쪽)가 열연하고 있다. SBS 제공

“‘토지’의 말을, 그리고 박경리 선생의 말을 모으고 싶었습니다.”

저자 김연숙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박경리 대하 소설 ‘토지’를 30년 넘게 공들여 읽어 온 연구자다. 대학에서는 2012년부터 9년째 교양 강좌 ‘고전 읽기: 박경리 ‘토지’ 읽기’를 운영하고 있다. 이 정도면 가히 ‘토지’와 박경리 마니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박경리의 말’을 밀고 가는 건 연상(聯想)이다. 저자가 옮겨 적은 뒤 차곡차곡 쌓아 각 글 첫머리에 놓은 박경리의 말들은 미문이나 아포리즘이 아니다. 화두다. 

“살았다는 것, 세상을 살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게는 살았다는 흔적이 없다. 그냥 그날이 있었을 뿐, 잘 견디어내는 것은 오로지 권태뿐이야.” 첫 글 ‘힘겹다, 세상살이’는 이 말로 열린다. 괴로움을 호소하는 ‘토지’ 등장인물 양현을 보며 이모뻘쯤 되는 명희가 한 이야기다. 명희는 20대인 양현의 고통과 슬픔이 부럽다. 투명하다고 감탄한다.

청춘은 상실되는 것이다. 저자는 대학 신입생 때를 떠올린다.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 1987년이다. “자신이 마주하는 모든 것을 온전하게 몸으로 느끼고, 겪어내는” 예민한 시절이었다. ‘월든’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호출된다. 깨어 있는 삶을 살겠다며 숲으로 들어간 미국 시인이다. 2년여간 호숫가 오두막에 살며 하루 한 끼만 먹었다. 일상 속에 무뎌진 감각을 다시 벼려 삶의 본질을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대하 소설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의 생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하 소설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의 생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저자는 서글프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그야말로 ‘흥챙이’가 돼 시큰둥한, 그렇고 그런 삶이 내 민낯”이라고 토로한다.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다. 세파에 단련돼 두터워진 살갗을 다행이라 여기는 어른도 있을 테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질문이다. “살았다는 건 무엇일까.” 책 전체의 화두이기도 하다.

글 ‘마음이 너무 바빠서’의 들머리는 ‘토지’ 제7권의 문장이다. “밤하늘 그 수많은 별들의 운행같이 삼라만상이 이치에서 벗어나는 거란 없는 게야. 돌아갈 자리에 돌아가고 돌아올 자리에 돌아오고, 우리가 다만 못 믿는 것은 이르고 더디 오는 그 차이 때문이고 마음이 바쁜 때문이지.” 이 통찰은 ‘변신’을 쓴 체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말과 통한다. “조바심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이다. 조바심 때문에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됐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어른이 돼서야 저자는 우회와 반추의 가치를 깨닫는다. 초조함 탓에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라는 게 저자 메시지다.

‘세상없는 바보들이…’는 옳다고 믿는 일에 헌신한 이들한테 바치는 저자의 헌사(獻辭)다. “잘난 사람은 일 못한다”는 ‘토지’의 대사가 올해 50주기를 맞은 전태일 열사 이야기와 연결된다. “똑똑하다는 우리의 분별력은 나를 합리화하기 위해, 나를 변명하기 위해 작동한다”며 우리가 사는 이곳을 만들고 온전히 지켜 온 건 수많은 바보들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박경리의 말

  • 김연숙 지음
  • 천년의상상 발행
  • 288쪽
  • 1만5,300원

작가 은유는 추천사에서 “박경리의 말이 카프카의 말, 조지 오웰의 말, 아서 프랭크의 말 등으로 연결되고 굽이쳐서 기어이 삶의 바다에 이르는 여정은 읽는 기쁨을 안겨준다”고 했다. 박경리의 강에서 길어 올려지는 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이다. 술술 넘어가지만 여운이 오래간다. 아무데나 들춰 읽고 생각에 잠기기도 좋다.

권경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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