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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만 점령하면 인민봉기" 예상 빗나가, 한강 도하 결정했지만…

입력
2020.06.25 04:00
수정
2020.06.29 18:07
8면
0 0

<1> 인민군은 왜 서울에서 사흘을 머뭇거렸나
"일주일 동안만 서울 해방하면…"
"남침 계획은 사흘 안 서울 점령"
당시 인민군 장교 회고록 등엔
서울 이남 남하계획 없었던 듯

편집자주

삶의 뿌리가 통째로 뽑힌 동족상잔의 비극이 꼭 70주년을 맞았다. 임진왜란, 6.25전쟁 등 한반도 격전지 답사에 천착해온 한국일보 출신 원로 언론인 문창재 칼럼니스트가 알려지지 않은 6.25 비극을 6회로 나눠 싣는다.


다시 유월이다. 같은 민족끼리 싸워 강산을 피로 물들였던 6·25 한국전쟁이 꼭 70년을 맞는다. 그 세월은 대다수 국민이 그 참상을 모르는 세대로 만들어 놓았다. 젊은이들이 6·25전쟁을 까마득한 옛일로 여기기에 충분한 세월이다.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에서 아버지 할아버지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때 사람들이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돌아보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 우리 사회 이념갈등의 원천은 수천만 전재민이다. 삶의 뿌리가 통째로 뽑힌 동족상잔의 비극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품고 있다. 70돌을 맞으면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때 그들은 왜 그랬던가?


총탄자국(붉은 화살표)이 선명한 임진강교 교각과 새 철교(왼편)가 70년의 변화를 말해준다.?

총탄자국(붉은 화살표)이 선명한 임진강교 교각과 새 철교(왼편)가 70년의 변화를 말해준다.?



삼팔선을 싱겁게 깨트리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 인민군이 서울에서 사흘을 머뭇거렸다. 서울을 함락시킨 기세로 밀고 내려갔으면 부산점령에도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손쉽게 ‘적화통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터인데, 왜 그랬던가? 이 의문은 6·25 전쟁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힌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론이 있지만 아직 정설이 없다. 추론의 첫째는 남한의 인민봉기를 기다렸다는 것이고, 둘째는 애초에 서울점령만을 목표로 한 제한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인민군의 중동부 전선 고전(苦戰)설이다. 그밖에 소련과 중국 개입설, 도하장비 불비(不備)설, 보급 및 병력 보충(補充)설 등이 있다.

인민봉기를 기다리며 서울에서 쉬었다는 견해에는 충분한 근거와 정황이 뒷받침된다. 인민군 고급장교들 가운데, 남조선노동당 박헌영(朴憲永)의 민중봉기 주장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북한 정권 실세들과 인민군 핵심 간부들의 주장이어서 신뢰성이 높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金枓奉)의 인민군2군단 출정담화에 그 단서가 숨어있다. 서울만 해방시키면 남한에서 민중의 봉기가 일어나 순조롭게 ‘통일과업’이 달성될 것으로 기대한 것이었다.  

남침 이틀 전인 1950년 6월 23일, 개성 송악산 주능선 아래로 이동해 출진을 대기하던 인민군6사단에 대대장급 이상 군관의 집합명령이 떨어졌다. 송악산 계곡에 마련된 천막 안에 고급군관들이 모이자 김두봉이 나타났다. 회의 벽두 그는 몇 가지 시국현안을 언급한 끝에, 곧 남조선 해방전쟁을 시작하게 된다는 본론을 꺼냈다.

“그동안 공화국에서는 조국평화통일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남북협상이 실패하였고, 남조선 인민들이 그토록 반대한 5·10 선거로 남조선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말았습니다.·······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동포들을 해방시켜야만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개시하게 되는데, 일주일 동안만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서울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거기서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로이 선출하고,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정부가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면 어느 외국도 우리를 간섭하지 못 할 것입니다.”

당시 인민군역사기록부장 및 6사단 정치보위부 책임 장교 최태환(崔泰煥·중좌)의 회고록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 나오는 담화내용이다. 낙동강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입산하여 신출귀몰하던 빨치산 ‘외팔이부대장’이 최태환이다. 1951년에 체포되어 9년간 옥살이 끝에 출소, 이 땅에서 살다 간 인물이다.

상해임시정부 요인이었고 한글학자로 유명한 김두봉은 북한정권 출범과 조선노동당 창당에 깊이 관여했고, 국가수반과 인민위원회 상임의장을 지낸 사람이다. 연설 끝에 몇 가지 질문을 받은 그는 ‘포로가 있을 수 없는 전쟁’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언제 개전이 됩네까?”

“수일 내에 있을 겁니다.”

“개전이 되면 포로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합네까?”

“이 해방전쟁에는 포로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네까?”

“이건 국가와 국가가 맞붙는 전쟁이 아닙니다. 한줌도 안 되는 민족반역자들을 제거하고 남조선 인민을 해방시키자는 목적이니까 국방군도 우리 동포로 여겨야 합니다. 이건 해방전쟁이니까요!”

중국공산당 팔로군 사단장 출신 방호산(方虎山)은 조선인으로 구성된 자신의 사단을 이끌고 북한에 와 같은 인원조직의 인민군6사단장이 된 인물이다.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작전에 능한 것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6사단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요란한 예비포성 속에 송악산 기지를 떠나 출정 길에 올랐다. 분단 후 폐지된 경의선 철도를 이용해 병력을 한 순간 개성에 집중시켜 작전의 귀재라는 평을 입증 받았다. 

평양으로 가던 길에 피폭되어 비무장지대에 방치되었던 경의선 열차 기관차.?

평양으로 가던 길에 피폭되어 비무장지대에 방치되었던 경의선 열차 기관차.?


국군의 저항은 예상외로 미약하였다. 그날 오전 9시 쉽사리 개성을 점령하고, 한강하구 쪽으로 강을 건너 26일 아침 김포반도를 통해 서울 서남쪽 개화산 아래에 도착했다. 인민군 부대 중 제일 먼저 한강을 건넌 부대다. 김포공항에 이르기까지 국군의 저항이 없었던 탓이다. 

개성 시가지에서도 국군과 맞닥뜨려 본 일이 없었다. 하각동(河閣洞)을 지날 때 “최후의 발악을 하던 국방군이 임진강 쪽으로 밀려가면서 무질서하게 패퇴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주파수가 국방군으로 맞추어진 무전기에서 “여기는 연대장이다. 무조건 철수하라”는 다급한 명령이 반복되고 있었다. 

서울시가지에 나타난 인민군 전차. 이 괴물같은 무기앞 국군용사들은 육탄을로 맞섰다. 자료사진

서울시가지에 나타난 인민군 전차. 이 괴물같은 무기앞 국군용사들은 육탄을로 맞섰다. 자료사진


당시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兪成哲· 당시소장)은 1990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나의 증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남침계획은 사흘 안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나게 돼 있었다. 서울을 점령하면 20만 남로당원이 일어나 남한정권을 전복시킨다는 박헌영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봉기는커녕 정족수 미달로 국회소집도 할 수 없었다. 

고려인 3세 유성철은 광복 전 김일성이 소속되었던 소련극동군 제88독립보병여단 복무 때 러시아어가 서툰 김일성의 통역으로 일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북한에 들어가 인민군 창설과 남침에도 깊이 관여한 인물이다. 전후 소련으로 망명, 서울에도 몇 차례 다녀갔다.

적105탱크사단 정치부 대위 출신 오기완(吳基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인민군은 서울에서 시일을 끌었고 미24사단 전력을 과대평가했다. 박헌영 등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 곳곳에서 30만 남로당원 봉기가 일어나 저절로 무너진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단 한 건의 봉기도 일어나지 않자 당황한 김일성은 29일 밤 서울에 와 지금의 삼각지우체국 건물 안에서 최고전략회의를 열었다. 어떤 자는 봉기가 없으니 모른 체하고 38선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했다 한다. 그러나 이미 국군 주력을 부쉈으니 쉽게 승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한강도하가 결정되었다.” 한국언론자료간행회 '한국전쟁 중군기자'에 실린 증언이다.

인민군 전선사령부 공병부부장 출신 주영복(朱榮福·중좌)은 회고록 '내가 겪은 조선전쟁'에서 3일을 머뭇거린 것이 ‘피치 못 할 전력상의 공백’ 탓이었다고 했다. 도하장비 부족으로 즉시 한강을 건널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군 전사(戰史)에는 그때 인민군이 서울에서 3일간 허송세월 한 듯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인민군 전력을 과대평가한 소치다. 인민군은 창군 이래 보병에만 치중했지, 기술병종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공병의 원시적인 상태는 최악이었다.”

“우리들에게는 서울 이남의 지도가 지급되지 않았다. 다만 37도선인 평택까지 나와 있는 5만분의 1 지도를 지참하고 있었다. 남조선 점령 후 지역행정을 관할할 내무서원들의 사전 준비교육도 없었다. 6사단에는 국군과 접전을 피하라는 사단장님의 지시가 떨어지기도 했다.”

최태환 회고록에 나오는 이 말은 제한전쟁설을 뒷받침하는 정황이다. “국군과 접전을 피하라”는 방호산의 지시도 서울포위 작전에 지장이 될 것을 의식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만 서울을 해방시키려는 것’이라던 김두봉의 연설도 그 설과 맞닿아 있다.


당시 서울 시가지 모습. 대로변에도 행인이 뜸하다. 자료사진

당시 서울 시가지 모습. 대로변에도 행인이 뜸하다. 자료사진


문창재 칼럼니스트(전 한국일보 논설실장)


필자는 2004년 한국일보 논설실장으로 퇴직한 후 내일신문 객원논설위원을 거쳐 올해 3월까지 논설고문으로 일했다. 저서에 '정유재란 격전지에 서다' '증언(바다만 아는 6.25 전쟁비화)' '나는 전범이 아니다' 등 10여권이 있다. 

<글 싣는 순서>

(1) 인민군은 왜 서울에서 사흘을 머뭇거렸나
(2) 해주점령 오보의 파장과 영향
(3) 남진을 주춤거린 동해안 축선
(4) 대통령 떠난 뒤 ‘서울사수’ 방송
(5) 미 사단장 딘 소장 실종사건
(6) 이형근 장군이 본 10대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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