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우연히 어릴 적 최애 만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주목받았던 대 히트작, 데스노트(death note)지요. 제목 그대로 누군가의 이름을 쓰면 그 사람이 죽는, 저승 살생부를 우연히 줍게 된 고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에서 메가 히트를 기록한 뒤, 아시아를 넘어 북미까지 뻗어 나가 3,0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한 작품인데요. 21세기에 출판된 만화 중 권당 판매량으로는 톱이라고 하니, 전 세계를 뒤흔든 히트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노트를 주워 사람을 죽여나가는 고등학생과 그를 검거하기 위해 추적하는 경찰청. 내용은 단순한 듯하지만 막상 살펴보면 상당히 복잡한데요, 노트를 주운 고등학생, 라이토가 모의고사 전국구 레벨의 수재라 상당히 지능적이기 때문입니다. 동경대 법대를 지망, 법조인이 되어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던 그는 노트를 얻게 된 뒤 세상의 정의를 위해 써야겠다며 '악인'만을 골라 죽입니다. TV에 신원이 공개되는 중범죄자를 모두 노트에 차곡차곡 적어나가지요. 악인들이 급사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면, 모두 죽음이 두려워 범죄를 저지르지 못할 테니까요.
서서히 나라 전체가 패닉 상태에 빠지는 상황에서, 국민 여론은 두 갈래로 분열합니다. "아무리 범죄자만 골라 죽인다 해도 살인마다. 잡아야 한다"와 "잘못한 놈들을 죽이는 건 정당한 응징이다"라는 입장이었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만화 속에선 후자의 여론이 더 강세를 보이게 됩니다. 결국 처음엔 조심스럽던 주인공도 점점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버립니다. "내가 곧 정의다"라고요.
어쨌든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이 만화. 어릴 적에 워낙 많이 봐서 전개를 다 외우고 있고, 결말의 반전까지 아는데도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더군요. 재미있어서?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접했던 시대엔 마냥 판타지 같던 만화 속 내용이, 2020년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공공연히 일어나는 현실' 같단 느낌이 들어서였습니다. 누군가 한 명을 지목해,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버리는 모습이 말입니다. 단지 종이 노트가 아닌, 키보드를 통해서요.
얼마 전에도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 두 '정의로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밥버거 사건과 골목식당 팥칼국수 집 사건인데요. 탤런트 박보검을 닮았다고 자칭하는 전혀 안 닮은 고등학생과 골목식당 백종원 대표의 피드백을 무시한 팥칼국수집 사장님을 향한 대중의 '엄벌'이 있었지요. 전자의 고등학생은 욕설과 사이버테러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고, 후자의 팥칼국수집 사장님은 울면서 "국민 여러분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영상으로 공개 사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의 죄목은 박보검을 닮은 척한 것과 백종원 대표의 말을 무시한 것입니다. 데스노트 만화 속 살생부 타깃들이 살인마, 강간범인 것과는 큰 차이점이지요?
물론 공통점도 있습니다. 타인의 생살여탈권을 쥐락펴락할 권한이 전혀 없는 사람이 '정의감'을 가장해 '판관'을 자처한다는 점입니다. "네가 잘못했으니까 우리가 단죄한다"는 논리로 모든 공격 행위는 정당화되어버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데스노트 속 주인공이 "내가 정의 그 자체다"라고 신을 자칭하는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만화 속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시나요? 주인공 역시 결국 죽습니다. 그 본인도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힌 채로요. 그리고 그때서야 뒤늦게, 세 가지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며 눈을 감습니다. 자신이 칼을 휘두를 자격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을. 잘못한 사람에겐 벌이 필요하지만, 자신이 그럴 권한은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함부로 휘두른 칼이 자신의 몫이 아니었을 때 결국 자신까지 해치고 만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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