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소설집 '화이트 호스' 낸 강화길 작가
한국의 제사 풍경을 소설의 한 대목으로 가져온다면 어떤 장르가 가장 어울릴까.
예전에야 우당탕탕 코믹 활극으로도, 훈훈한 가족 드라마로도 풀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시대가 아니다. 2019년 가을 계간지 문학동네에 발표된 강화길의 단편 '음복'은 죽은 귀신을 위해 상을 차리고, 귀신이 먹다 남긴 음식을 남은 온 가족이 나눠 먹는다는 제사상이란 '스릴러' 혹은 '호러'에 어울린다는 점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음복'은 남편이 평생 몰랐던 가족의 비밀을, 시댁 제사에 처음 참석한 며느리는 단박에 파악해낸다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가부장제에서는, 모를 수 있는 것이 곧 권력"임을 서늘하게 지적한 이 소설은 강 작가에게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안겼다. '음복'을 비롯 7편의 소설이 실린 신작 소설집 '화이트 호스'를 낸 강 작가를 15일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화이트 호스'에는 '음복'의 며느리를 비롯, 기이하고도 삐뚤어진 세계를 홀로 눈치채고 공포에 휩싸이는 여성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가혹했던 할머니와 다정했던 할아버지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깨닫는 손녀('가원'), 음험한 시골 마을에 고립된 여교사('손') 등.
'홀로 깨달았으나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자의 불안'이라는 스릴러 장르 특유의 고전적 장치는, 어쩌면 한국 여성들의 일상적 삶에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일 지도 모른다. "어디에나 있는 여자들 이야기로 어디에도 없는 장르에 이르렀다"는 소설가 편혜영의 평은, 이 지점을 가장 정확하고 간결하게 정리한 한 문장이다.
그래서인지 강 작가에겐 "'여성 스릴러'라는 장르를 개척했다"를 평가가 따라붙는다. 첫 소설집 '괜찮은 사람'(2016), 장편소설 '다른 사람'(2017)에 이어 '화이트 호스'까지. 여성들이 느끼는 어떤 불안감을 생생하게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스릴러'는 한때 강 작가의 컴플렉스였다. "습작 때 히스테릭한 여성 인물들이 주로 등장하는 소설을 많이 썼어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죠. 그러다 어느날 내가 쓰고 싶어 하는 이야기, 그 자체를 인정하자 싶었죠. 두드러지는 단점이라는 건, 다시 말해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그니처라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렇다고 강 작가 소설 속 여성들이 마냥 피해자인 것 만도 아니다. 심지어 작품 내내 불안과 공포에 떨던 여성 주인공이 마지막에 이르러 그 공포의 주모자로 밝혀지기도 한다. 이같은 이중성과 모호함을 통해 여성은 단편적 피해자가 아니라 복합적인 존재로 생명력을 얻는다. 강 작가는 "여성뿐만 아니라 원래 인간 자체가 온전히 착하거나, 온전히 나쁘기만 할 수 없지 않나"라 말했다.
남성 또한 그런 존재다. "'음복'에 등장하는 남편의 무해함, 무지함 역시 어쩌면 아내만큼이나 복잡한 맥락이 있지 않을까요. 정말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채로 있는 게 자신을 보호하는데 유리하리란 무의식이 작동하지 않았을까요. 이해할 수 없던 시할아버지 역시 전쟁으로 인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었을 테고요. 나와 같은 역사에서 비롯하지만 다르게 발현됐을 뿐인 복잡성이랄까요."
소설집의 제목이 된 '화이트 호스'는, 짐작하다시피 공주님들이 기다린다는 그 백마가 맞다. 한 때 미국 컨트리 음악의 공주님이었던 테일러 스위프트는 "난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가 아니며, 더 이상 백마는 기다리지 않는다"고 노래한다. 그 노래 제목 '화이트 호스'에서 따왔다. 강 작가는 이렇게 풀이했다.
"아마 나는 평생 고택 안을 헤매며 살게 되겠지. (...) 그리하여 이번 소설집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그 집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고리를 끊고, 의미를 바꾸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성에 안주하는 대신, 차라리 성을 헤매기로 결심한 작가의 결의리라.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