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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악관을 배경으로 18일(현지시간) 촬영된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의 표지. 연합뉴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문재인 정부 들어 북한 비핵화를 겨냥해 진행된 일련의 남북ㆍ북미 정상회담을 ‘외교적 판당고’로 규정했다. 판당고(fandango)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 무곡과 춤을 가리킨다. 플라멩코의 대표적 갈래로 꼽히는데, 대개 경쾌한 3박자 리듬을 타고 기타와 노래가 혼주되는 가운데 캐스터네츠를 손에 든 한 쌍의 남녀가 춤을 추는 식으로 진행되는 공연이다. 은유를 우리 식으로 풀이하면 ‘북 치고 장구 치며 춤 추는 한 바탕의 요란한 쇼’ 정도의 의미가 될 것이다.
▦ 볼턴은 대북 강경파였다. 북한 핵을 제거할 확실한 해법으로 북폭(北爆)을 선호했다. 당연히 대화를 통한 해법에 대해선 부정적이었고, 그런 맥락에서 남ㆍ북ㆍ미 정상회담을 요란한 쇼에 불과한 판당고로 폄하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최근 그가 펴낸 회고록에는 북미 정상회담을 냉소적으로 평가하는데 작용했을 만한 만만찮은 정황이 여럿 등장하는 것도 사실이어서 냉정한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그는 2018년 6월 1차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부터 ‘오해’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은 3월 평양 방문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와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고 전했다. 또 문재인 대통령은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마친 뒤, 5월 미국 방문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에게 1년 안에 비핵화를 하도록 요청했고, 김정은이 동의했다”고 확인했다. 한편 회고록엔 나오지 않지만, 제2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 대통령은 영변 핵시설 폐기를 약속하면 제재해제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김 위원장을 설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 이렇게 보면 우리 측은 북미대화의 중재자를 자처했지만, 미국과 북한에 각각 오해의 소지가 큰 잘못된 메시지를 제공하면서 북미대화를 이끌어온 셈이 된다. 물론 정부로서는 2017년 후반 트럼프의 ‘화염과 분노’ 발언으로 최고조에 이른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려는 절박한 시도였을 수 있다. 그럼에도 볼턴 회고록과 그간 알려진 정황에 따르면, 북미대화는 애초부터 헛된 기대에 근거한 사상누각에 불과해 한 판의 요란한 ‘판당고’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 측이 당시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곧이곧대로 믿은 건지, 알고도 속은 건지 그게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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