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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여배우는 왜 남편의 불륜을 사죄했나?

입력
2020.06.24 04:30
수정
2020.06.24 05:47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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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우리’와 일본의 ‘우치’, 인간 관계의 비교 문화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나와 공동체 사이의 관계 설정을 둘러싸고 미묘하지만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문화적 배경에 따른 것이어서 어느 방식이 옳고 그른지는 가려내기 힘들다. ?일러스트 김일영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나와 공동체 사이의 관계 설정을 둘러싸고 미묘하지만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문화적 배경에 따른 것이어서 어느 방식이 옳고 그른지는 가려내기 힘들다. ?일러스트 김일영


◇남편의 불륜에 대해 대중에게 사죄한 연예인 부인 

일본 사회가 유명 연예인 부부의 불륜 스캔들로 왁자지껄하다. 훈남 캐릭터로 높은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이 16살 연하의 잘 나가는 여배우와 결혼에 골인하고 이듬해 아들이 태어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결혼 생활 3년을 겨우 넘긴 시점에서 이 여자, 저 여자와 외도했다는 사실이 대중 매체에 보도되었다. 인기 연예인이 연루된 막장 드라마 같은 실화에 방송계와 소셜 미디어가 발칵 뒤집어졌다. 불륜을 저지른 본인은 잘못을 시인하고 출연 중인 모든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의 부인이 “남편의 잘못된 행동으로 불쾌함을 느낀 많은 분들께 대단히 죄송하다”는 사죄의 글을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그녀의 투고에 대해 “잘못한 것은 당신이 아니다”, “위기를 잘 넘기기를 바란다”는 응원의 메시지가 넘쳐나고 있다고 한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것이 배우라고는 하지만, 사적 관계에서 불거진 문제에 대해 공적으로 사죄를 하는 것은 의아하다. 무엇보다 배우자의 외도로 가장 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당사자가 대중에게 머리를 숙이는 상황은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에서도 연예인 부부의 불미스러운 스캔들이 호사가들의 입담에 종종 오르지만, 피해자 입장인 배우자가 사죄문을 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한국인에게는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이런 정서의 바탕에는 ‘우치(うち)’ 라고 부르는 일본의 독특한 공동체 감각이 있다.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우치’와 ‘우리’ 

일본의 ‘우치’는 가족이나 친구 등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면에서는 한국의 ‘우리’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일상 속의 공동체 감각으로서는 다른 점이 적지 않다. 한국의 ‘우리’는 사적인 교류와 친근함으로 뭉친다는 의미가 크다. 그에 비해 일본의 ‘우치’는 공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부부나 가족, 친구 관계 뿐 아니라, 회사나 단체 등 집단에 소속되는 것 역시 ‘우치’라는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치’가 ‘우리’와 구별되는 특징은,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이 동일시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이 차이가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한일간에 서로 다른 존댓말 사용법이다. 일본에서는 외부 사람을 상대로 할 때에는, 손위 사람이라고 해도 ‘우치’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겸양하는 것이 예의이다. 한국에서는 “아버님께서 진지를 드시다가…”라든가 “저희 사장님께서 말씀 하시기를…”라는 존댓말이 자연스럽지만, 일본에서는 “부친이 밥을 먹다가…”, 혹은 “저희 회사 사장 스즈키의 방침이…” 라는 식으로 낮추는 것이 올바른 화법이다. ‘우치’는 나와 동일하기 때문에, 일본어로 자기 아버지를 높여서 말하면 마치 “나님께서 진지를 드셨다”고 스스로를 존대하는 듯한 부자연스러운 느낌으로 전달된다.

그러다 보니 ‘우치’의 잘못은 곧 나의 허물이라는 공식도 성립한다. 공동체 성원의 잘못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것이 ‘우치’의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여겨진다. 배우자의 과실은 부부가 함께 반성하는 것, 구성원의 실수는 회사 전체가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우리’로 분류되는 친한 사람에 대해 연대 책임을 묻는 정서가 어느 정도는 존재한다. 하지만, 연대 책임을 지느냐 마느냐, 어느 선까지 지느냐 라는 점은 각자의 도덕적 기준에 따른 개인의 판단 영역으로 본다. 이에 비해 일본 문화에서는 ‘우치’에 대한 연대 책임이 일종의 사회적 규범이다. ‘우치’에 대한 단단한 책임 의식이 신뢰할 수 있는 사회인의 필요조건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앞서 소개한 연예인 부부같은 불편한 사례가 생긴다. 연예인은 사적인 해프닝이 외부적 활동에 큰 영향을 주는 특수한 직업이다. 사적인 부분에 대해 공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적으로는 불륜으로 상처를 입었을지 언정, 공적으로는 배우자의 흠을 남몰라라 하지 않는 ‘성숙한’ 사회인의 모습을 어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남편을 위한 희생을 아내의 미덕으로 여기는 가부장적인 사고 방식도 거들었을 것이다.

◇일본인이 내성적으로 보이는 이유

한편, ‘우리’에 반대 개념인 ‘남’ 도 일본에서는 미묘하게 뉘앙스가 다른 ‘소토 (そと)’와 ‘요소 (よそ)’ 라는 두 범주로 나뉘어진다. ‘우치’에 속하지 않는 외부인 중에서도 ‘소토’는 사회적으로 좋은 인상을 줄 필요가 있는 상대를 뜻한다. 비즈니스 파트너, 사업상 고객, 아이들 학교의 선생님 등 사회적 이해 관계로 엮여 있는 이들에게는 늘 상식적이고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반면, ‘요소’는 아무런 사회적 교류가 없고


,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없는 상대를 뜻한다. 길에서 마주친 행인, 낯선 사람 등이 이런 이들인데, 외국인도 종종 이 범주로 취급된다.

굳이 ‘소토’와 ‘요소’를 구분하는 것은, 각각에 대한 사회적 태도와 기대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소토’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상대도 격식을 갖출 것을 기대한다. 서로에게 신뢰할 만한 사회인이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요소’에게는 무례한 태도가 나오기도 한다.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친절하던 일본인이, 길 거리나 전철에서 마주친 행인에게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쌀쌀맞게 구는 경우를 본다. 의도적으로 상대를 가리는 행동이라기 보다는, ‘소토’와 ‘요소’를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가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한국 문화에서는 ‘우리’와 ‘남’의 경계선이 변화무쌍하다. 예전에는 ‘남’이었지만 ‘우리’로 뭉칠 수도 있고, 오늘의 ‘우리’가 내일은 ‘남’으로 돌변할 수도 있는 만큼, 처음부터 인간 관계에 선을 그어서 굳이 불리한 상황을 만들 필요가 없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불쑥 나이나 출신지를 물어서 사적인 연고를 탐색하고, 조금 친해지면 “형, 동생으로 지내자”, “언니라고 불러도 되냐”고 다가선다. 한국 문화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이런 사교적 행동은 나의 편인 ‘우리’를 적극적으로 늘리려는 의도로도 읽힌다.

이에 비해 일본의 ‘우치’, ‘소토’, ‘요소’의 구분은 장벽이 높아서, 개인적인 사교술이나 화술로 뛰어넘기는 쉽지 않다. 결혼이나 입학, 취직, 개업 등의 공적인 계기를 통해 ‘우치’ 공동체에의 참가가 확정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니 사적 인간 관계를 넓히는 데에는 다소 소극적이다. 다른 나라 사람의 눈에는 일본인이 “내성적이다”, “수줍음이 많다”고 비치곤 하는 것은 이 때문일 터, 낯선 이와의 장벽을 허무는 방법보다는 정해진 인간 관계 속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모색해 온 문화적 습관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은 ‘우리가 남이가’ 정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

역동성과 인간미가 넘치는 한국 사회에 비해, 일본의 인간 관계가 차갑고 건조하게 느껴진다는 독자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에나 좋은 사람은 있고, 거북한 인간 관계도 있다. 타인에게 불쑥 다가서는 적극적인 사교 문화가 부담스럽다는 한국 사람이 의외로 많고, ‘소토’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격식의 굴레가 답답하다는 일본 사람도 적지 않다. 일단 인간 관계가 굴러가기 시작하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이 넘치는 인간 관계가 엉뚱하게 지역 감정을 부채질하는 역효과를 낸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우리가 남이가’ 정신이 정치나 자본 등 권력 근처에 뿌리내린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반면, 일본 사회에서는 ‘요소’에 대한 냉랭한 정서가 외국인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과 차별을 합리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외부인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이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도 된다. 각각의 문화에는 각각의 과제가 있는 것이다.

김경화 칸다외국어대 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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