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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와 외박하는 대학생 딸, 내버려둬도 될까요

입력
2020.06.22 04:30
수정
2020.06.22 08:22
24면
0 0

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삽화=박구원 기자

삽화=박구원 기자


저는 대학생 딸이 있는 엄마에요. 딸은 어렸을 때부터 기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훈육해도 하나도 듣질 않았어요. 친구들과 놀다 집에 가자고 하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떼를 쓰기 일쑤였어요. 초등학교 때는 수학이나 중국어를 가르쳐 줬는데 제 맘같지 않아 많이 혼났습니다. 그때만 해도 흔한 문제 정도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이가 중ㆍ고등학교에 가면서 갈등은 더 커졌어요.  학교에서 금지하는 화장을 하는 바람에 제가 학교에 불려간 적도 있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아이는 더 엇나갔습니다. 다정한 남편조차 손찌검을 할 정도였어요. 딸은 그럴 때면 원망 가득한 눈으로 분노를 표출했어요. 소리를 지르고 벽을 내리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공부는 그럭저럭해서 대학은  본인이 원하는 곳에 갔습니다.

번듯한 대학도 갔고 다 컸으니 이제 무슨 걱정이냐지만, 대학생이 된 딸은 이제 아주 여보란 듯 제 마음대로 삽니다. 저도 '어디 한번 네 멋대로 해봐라’고 나둬봤습니다.  딸은 코에 피어싱을 하더니, 머리도 염색하고 짧게 파인 옷을 입고 다닙니다.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웁니다. 동이 틀 때까지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최근엔 남자친구와 외박도 합니다. 

제 속은  시커멓게 타 들어가지만 그래도 참고 “서로 예쁜 사랑하며 좋은 시간 보내라”고도 해줬어요. 하지만 너무나 당당하게 외박하겠다 할 때면 너무 화가 납니다. 딸은 “이제 나는 성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아서 너무 행복하다” “성관계는 아무 문제가 안 된다”고 합니다.

제 상식으론 딸이 이해가 안 됩니다.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무난하게 자랐어요. 딸은 저와 가치관이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딸의 행동은 가치관과 상관 없어 보입니다. 어느 부모가 대놓고 남자친구와의 외박을 허락해주고, 술 먹고 담배까지 피우는 자식에게 ‘네 알아서 살아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부모로서 그냥 아이를 지켜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렵더라도 아이를 계속 설득해야 하는 걸까요.

박수진(가명ㆍ48ㆍ주부)



수진씨, 아이를 키우면서 굉장히 힘드셨을 거에요. 딸은 아마 어렸을 때부터 뭐 하나 수월하지 않았던 아이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의미에서 좀 별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다르게 얘기하면 모범적으로 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비도덕적이거나 나쁜 행동을 하거나 하는 것도 아닙니다.  냉정하게 보면 어른 입장에서 칭찬할 만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법을 어기거나 해를 가하거나 스스로 위험하게 하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닙니다.

제 생각에 딸은 예민한 기질의 어려운 아이였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환경이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을 거에요. 이런 아이들은 주로 자기 의견만 고수하는 경향이 강해요. 그래야 안심되니까요. 부모의 훈육에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은, 불편함을 가라앉히려면 자신이 하던 대로 해야 하고, 그래서 필사적으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려고 하지요. 

예를 들어 주방에서 아이가 무엇인가 만지려 할 때 엄마가 ‘위험하니깐 만지지 마’라고 하면 보통은 ‘엄마가 위험하다 했으니까 다음부터 만지지 말아야겠다’고 받아들이지만, 예민한 아이들은 나중에라도 꼭 한번 만져보면서 ‘별로 안 위험하네, 괜찮네’라고 스스로 확인해야  불안이 해소됩니다. 오기를 부리는 아이들은 자기 방식대로 우위를 점해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딸이 반듯하지 않아도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도  ‘화장하고 그래도 나 공부는 잘하거든’ 이런 걸 증명하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수진씨의 딸도 어떤 상황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못 견디는 예민한 아이였을 거예요. 물론 부모는 너무 힘듭니다. 더구나 수진씨와 딸은 서로 너무 다른 기질을 갖고 있어요. 평범하고 무난하게 자라온 수진씨에 비해 딸은 기질적으로 다른 아이입니다.  그런 기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수진씨는 딸의 생활방식이 다른 게 아니라  잘못된 거라고 봤을 거예요. 아이의 성향을 고려해 ‘아이가 이런 부분은 불편해하는구나'가 아니라 '저 행동은 뜯어고쳐야 할, 바로잡아야 할 문제구나'라고 판단했을 거예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수진씨. 한 사람은 태어난 것과 길러진 것의 합으로 이뤄집니다.  아이가 예민한 기질을 타고났지만 수진씨와의 관계에서 그런 기질이 더 강화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진씨가  아이의 행동을 '문제 행동'이라 규정지어 고치려고 했을 때, 딸은 당신의 태도를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저항하려고 했을 거예요. 당신이  고치려 할 수록 딸은 더 거세게 저항했을 겁니다. 당신은 아이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됐는가를 얘기했을 거고, 딸은 부모가 과도하게 요구한다며 저항했을 거고, 다시 당신은 딸의 그런 태도를 지적하는 악순환이 반복됐을 겁니다.  어쩌면 전쟁 같은 외부의 나쁜 상황을 피해 숨을 수 있고,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 집이고 부모여야 하는데 딸에게는 부모가 저항해야 할 대상, 집이 전쟁터였을 거예요. 당신도 매일 딸과 전쟁하듯 살아왔을 거예요.

아이의 행동을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게 부모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렸을 때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기본이 되는 원칙과 기준을 알려주고 생활질서를 바로 잡아줘야 합니다.‘밥을 골고루 먹어라’, ‘손을 깨끗이 씻어라’ 같은  생활규칙은 부모가 알려줘야 합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그런 기본적인 생활질서를 말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대화를 할수록 갈등은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밤에 늦게 다니지 말고 일찍 일찍 다녀라’, ‘염색이나 피어싱은 하지 마라’ 같은 얘기는, 딸의 입장에선 ‘밥을 골고루 먹어라’와 같은 수준의, 생활방식에 대한 얘기입니다. 딸이 성인인 이상, 수진씨가 다소 속상한 부분이 있더라도 성인으로 대해줘야 합니다. 그 부분은 오롯이 딸 스스로 감당하고, 책임질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딸을 방치하란 건 아닙니다.  저는 수진씨와 딸이, 성인 대 성인, 인간 대 인간으로서 보다 나은 관계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딸로 인해 괴로웠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의 기준과 달라서 당신의 내면이 건드려졌기 때문이고, 당신 기준에서 아이가 잘못돨까봐 두려워서였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딸은 모범적이진 않아도, 스스로 책임지지 못할 수준으로 사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성인으로서 문제가 있는 행동일 경우 부모가 도와줘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부모로서 자식과 좀 더 건강한 관계를 가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태도, 겉모습보다는 딸이 어떤 삶을 살고 싶어하는지, 딸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딸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인지, 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인생의 가치에 관해 얘기해보는 건 어떨까요.

딸의 행동에 관해 얘길 안 할 수 없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라’라는 말 대신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가질 때 피임은 꼭 했으면 좋겠어, 엄마는 네가 혹시나 실수를 해서 네가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야’라고 하거나 ‘나는 네가 외박을 하고, 염색한다고 문제가 있는 애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네가 잘못될까 봐, 오해를 살까 봐 걱정해서 하는 얘기다’라고 딸의 행동을 지적하기보다 그에 앞서 진심을 먼저 전달한다면 딸과 더 깊은 속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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