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러운데 빠져드네” 발굴해서 노는 재미, 뉴트로까지 번져

이전기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촌스러운데 빠져드네” 발굴해서 노는 재미, 뉴트로까지 번져

입력
2020.06.18 04:30
0 0

 [#빠지다, 한국인의 탐닉] <3>레트로, 복고풍 감성에 젖다 

 익선동 카페ㆍ을지로 노포 붐비고, 90년대 인기 가수들도 재조명 

 아날로그 감성 찾는 이들 늘면서 추억 부르는 ‘복고 마케팅’ 활발 

 “소비자들, 일률적인 문화에 질려” 복고를 새롭게 소비하며 재탄생 시켜 

이달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익선동 좁을 골목에 젊은이들이 오가고 있다. 신지후 기자

지난 14일 저녁 서울 종로구 익선동의 한 카페 앞에서 유독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외관은 한옥인데 내부는 붉은 원목 인테리어와 꽃무늬 벽지 일색인 카페였다. 영락없는 1930년대 ‘경성(京城)’ 거리의 찻집 모습. 여느 카페들에 차고 넘치는 커피머신 대신 바에서는 직원이 다기로 차를 내렸다. 요새 유행인 생크림 케이크나 마카롱 대신 ‘양갱’ 과자를 팔았다.

익선동뿐 아니라 종로 곳곳에선 비슷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2020년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가게보다 30년 전, 혹은 더 이전의 감성을 살린 곳들이 젊은이들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유행의 중심지였던 명동 거리보다 골목 사이사이 노포들이 들어찬 인근 을지로 거리가 ‘핫 플레이스’인 시대다.

최근 몰아친 ‘레트로(Retroㆍ복고주의) 열풍’은 음식과 패션, 음악, 소비,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키워드다. 한국인들은 최첨단, 디지털, 세련 등의 가치보다 유행에서 한발 떨어졌던 아날로그, 촌스러운 감성에 더 강하게 빨려 들었다.

 ◇레트로 선도하는 음악계…90년대 스타 재소환 

레트로 인기가 가장 뚜렷한 분야는 음악계다. 최근엔 유명 래퍼나 아이돌그룹만큼 1990년대 인기를 누렸던 가수들이 조명을 받는다.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입소문을 타며 연예계를 떠난 지 20년 만에 소환된 가수 양준일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초 활동했던 양준일의 패션과 춤사위가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는 놀라움은 당시 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옛 노래에 신선함을 느낀 젊은 세대는 ‘온라인 탑골공원(온라인과 노년층이 많이 모이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을 합친 말)’에서 옛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찾아보며 즐긴다.

가수 비가 2017년 12월 발표했을 당시 주목을 받지 못했던 노래 ‘깡’이 최근에서야 인기몰이를 하는 것도 레트로 현상과 무관치 않다. 비의 ‘깡’은 ‘1일 1깡’(하루 한 번씩 깡을 듣는다) ‘식후깡(밥을 먹고 난 뒤엔 반드시 깡을 듣는다)’ 등 온라인에서 콘텐츠를 복제하며 즐기는 ‘밈(MEME)’ 소재가 돼 유행처럼 번졌다.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는 이러한 흐름을 감지, 1990~2000년대 슈퍼스타였던 비와 이효리, 유재석을 혼성그룹으로 재데뷔시키려는 단계에 이르렀다.

1990년대 말 걸그룹 SES와 핑클의 콘셉트를 따라 곡을 낸 치스비치. 치스비치 제공

CD와 스트리밍서비스 등에 밀려 존재조차 희미해진 LP도 레트로 열풍을 타고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오는 8월 정식 발매되는 가수 백예린의 정규 1집 LP 선주문 수량은 최근 1만5,000장을 기록했다. 당초 2,000장을 한정 판매로 기획했으나 반응이 뜨거워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LP 생산업체인 마장뮤직앤픽처스에 따르면 지난해 LP 판매량은 60만장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된다. 2016년(28만장)에 비해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최근 레트로 현상의 또 다른 묘미는 과거의 문화를 그대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감성과 혼합해 새 장르로 재탄생시킨다는 점이다. 일명 ‘뉴트로(New와 Retro의 합성어)’다. 1990년대에 태어난 가수 겸 작곡가 박문치(24)를 비롯해 가수 죠지(27), 걸그룹 치스비치 등은 1990년대 유행곡 멜로디에 요즘 세대의 생각을 가사로 녹여낸 신곡을 잇따라 내며 세대를 넘나드는 인기몰이 중이다.

 ◇맥주에도 ‘레트로’ 입히면 판매량 불티 

예스러운 것이 더욱 ‘힙(hipㆍ고유한 개성을 가지면서 유행에 걸맞다는 뜻)’한 것이 된 만큼 산업계에서는 너도나도 상품에 레트로 콘셉트를 접목 중이다. 대한제분은 편의점 CU와 손잡고 자사의 밀가루 상표를 활용한 ‘곰표’ 수제맥주를 출시해 재미를 보고 있다. 이 맥주는 일주일 만에 30만개 이상 판매됐다. 테라, 카스 등 주요 맥주 브랜드의 판매량이 주 60만개, 판매량 최상위인 수제맥주 브랜드가 5만개 수준임을 고려하면 주목할 만한 판매량이다. 맥주 캔 겉면 디자인에 옛 곰표 밀가루 포대 모양을 따와 레트로 감성을 자극한 덕이 크다.

옛 곰표 밀가루 포대 디자인을 입힌 캔 맥주와 과자들. CU 제공

요즘 대형마트의 진열대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하다. 1970년대부터 ‘보리차병’으로 쓰였던 델몬트 주스의 유리병 디자인과 1970~90년대에 사용되던 칠성사이다 디자인이 다시 돌아오는가 하면, 초록색 분식 그릇과 꽃무늬 양은 쟁반 등이 주요 코너에 진열돼 있다.

몇 년 전까지 현대적이고 세련될수록 상종가였던 상권도 최근엔 반대의 흐름을 타고 있다. 오래된 내ㆍ외관을 그대로 유지한 가게들이 되레 인기를 끈다. 서울 종로구의 한 공인중개사는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 남양주와 양평, 경북 경주 등에서도 한옥이나 수십 년 된 건물이 상점으로서 인기가 많다”고 귀띔했다.

지난 15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일식집에 옛 '대우전자 지정점' 간판이 그대로 붙어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서울 마포구의 한 대중목욕탕을 리모델링한 카페. 신지후 기자

 ◇“더 새로울 것 없는 문화에 신선한 충격” 

한국인은 왜 이토록 레트로에 열광하는 걸까. 많은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일률적이었던 국내 문화계에 지루함을 느낀 소비자들의 심리가 투영됐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지난 20여년간 대중들은 대형 기획ㆍ제작사 중심으로 개발해 내놓은 비슷한 형태의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해 왔기 때문이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시장에서 소비자들은 오히려 과거의 것들을 신선하게 느끼게 된 것”이라며 “그간에는 대형 회사 중심으로 문화계가 움직이면서 소수 장르가 외면받았지만, 레트로 열풍으로 소비자들이 다양한 문화를 즐기는 건 매우 긍정적”이라고 분석했다.

소비자들이 콘텐츠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 직접 발굴해 갈수록 재미가 커진다는 레트로 문화의 속성도 한몫을 한다. 대학생 신희정(23)씨는 “레트로는 옛 자료들 속에서 재미있는 것을 끌어와 나름대로 해석해 보는 맛이 있다”면서 “요새 나온 힙합 가수나 아이돌을 잘 모르는 부모님 세대와도 이야기할 거리가 생긴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한국인의 탐닉
한국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네이버엣도 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스탠드에서 구독하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