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순 동국대 명예교수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화학을 공부한 사람이 술도 못 만들어요. 우리 술 좀 담가 먹읍시다.”
20년 전 술 좋아하는 남편의 애교 섞인 이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화학과 교수가 술 빚는 사람으로 변신하게 된 연유는 이처럼 엉뚱했다. 2011년 8월 대학 교단을 떠나 9년째 술과 함께 활기찬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김영순(74) 동국대 명예교수의 이야기다. 그는 대학교수시절 배운 민화에 대한 열정도 놓지 않고 화가로도 활동 중이다.
지난 11일 경기 포천의 전통주 작업장에서 만난 김 교수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다. 오는 9월 ‘숨 쉬는 우리 술 체험행사’ 준비 때문이다. 김 교수가 사는 이곡리 마을이 포함된 국립수목원 생물권보전지역의 주민 공동체 사업으로, 마을 잔치나 다름없다. 김 교수는 행사에서 마을 인근 광릉(조선 세조와 정희 왕후의 능)의 이름을 따 손수 개발한 광릉주 등 3종류의 술을 내놓는다. 이와 별개로 지난 10일부터는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우리민화협회 회원들과 함께 민화 전시회도 열고 있다.
김 교수는 “술은 사람들 간의 벽을 허물고 친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며 “우리술의 매력을 널리 퍼뜨리고 싶어 우리술 체험행사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전통주 애찬론을 펴는 그이지만, 술은 마시지 못한다.
전통주 공부는 술을 즐겨 마시던 남편의 제안에 대학교수로 있던 2000년부터 시작했다. 처음엔 화학을 연구한 자신감에 독학으로 연습했다. 하지만 전통주 본연의 일정한 맛을 내는데 실패했다. 이후 북촌전통주문화연구원의 남선희(현 전통주 갤러리 관장) 선생을 찾아가 제대로 전통주를 배웠다.
“발효과정이 화학적 변화이고, 술의 색채도 광화학의 빛과 연관돼 있으므로 화학을 전공한 내가 만들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정이 쉽지 않았죠. 공부를 시작하고 5년이 지나서야 제 맛이 났습니다. 이제는 좀 더 과학적으로 전통주를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지요.”
그의 전통주 사랑은 농촌마을에도 활력을 불어 넣었다. 50대 주부부터 70대 퇴직자까지 주민 10명이 모여 2년 전 마을공동체인 ‘숨쉬는 우리술’을 결성했다. 이들은 김 교수와 함께 술도 빚고 정성스럽게 만든 술을 이웃에 나눠주며 유쾌한 기운을 퍼트리고 있다.
김 교수는 일주일에 하루는 서울 잠실 송파여성문화회관으로 향한다. 6년째 이어오고 있는 ‘맛있는 우리술과 발효 이야기’라는 전통주 강의를 위해서다. 지금은 코로나19 여파로 강의가 잠시 중단됐지만, 대학 교수 때만큼 열정적으로 강의를 펼친다. 지금까지 가르친 수강생만 250여명에 달한다.
그는 “전통주가 200여 가지 되는데, 솔잎으로 빚은 ‘송엽주’, 조선시대 서민들이 즐겨 마시던 ‘석탄향’ 등 50여 가지의 명주 제조법을 수강생들에게 전수하고 있다”며 “후배들이 전통주의 제 맛을 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하는 게 나의 목표”라고 전했다.
그가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에도 후진양성에 힘을 쏟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적당량만 마시면 몸에 좋은 전통주를 더 많이 알리고 싶은 바람에서다.
“전통주는 정확한 분량의 재료와 좋은 누룩, 발효과정의 정확한 온도와 습도 중 하나만 맞지 않아도 신맛이 납니다. 제조법이 까다롭지요. 하지만 와인에 비해 많은 효모가 들어가 과음만 하지 않는다면 몸에 굉장히 이롭습니다. 전통주를 잘 보존해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그가 주로 약선(약이 되는 음식) 목적의 술을 빚는 이유다. 실제로 김 교수가 지역 명을 따 만든 이곡주, 광릉주, 소흘약주에는 모두 도라지, 구기자, 솔잎 등 각종 약재가 들어가 있다. 술 빚는 과정도 깐깐하다. 늘 온도계를 들고 다니며 수온을 재고 누룩도 볕이 좋은 날만 골라 말린다.
김 교수는 “정성스럽게 빚어 제 맛이 나는 전통주를 이웃들과 나눠 먹는 기쁨은 삶의 활력소”라며 “그렇다고 무작정 좋다고 마구 마셔서는 안 되며, 내 몸 어디에 좋은지 알면서 적당 양을 먹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그는 민화 화가로도 불린다. 민화를 그리기 시작한 지도 20년이 됐다. 교수 시절 여학생들에게 권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배웠는데 어느덧 중견 작가로 성장했다.
김 교수는 “가양주(집에서 빚은 술)인 전통주와 마찬가지로 민화도 조선시대 서민들이 그렸던, 삶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전통의 문화”라며 “풍자와 해학이 넘치고 서민의 소망이 담긴 매력적인 예술장르”라고 평가했다.
그의 민화작품도 실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지인, 마을주민들과 함께 민화연구모임을 결성해 함께 그림을 그리고 수제품도 만든다. 일반적인 작품과는 다르게 민화를 새겨 넣은 옷이나 액세서리 작품을 제작해 매년 9월 열리는 지역 축제인 ‘수목원 가는길’에서 전시 판매한다.
누구보다 열정으로 가득한 일상은 그의 삶의 궤적과도 닮아 있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한 그는 1969년 졸업 후 사진을 현상하는 기업 연구실에서 일했다. 하지만 여성의 승진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에 부딪히자 더 큰 꿈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국내 생산이 불가능했던 필름과 인화지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엔 모교인 동국대에서 화학과 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인생 2막을 즐겁게 사는 지혜도 전했다. 나의 재능을 베풀면 행복은 두 배로 커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내일 눈을 감더라도 오늘 내가 가진 재능을 주변에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베풀려고 노력합니다. 나누면 주변 사람들도 성장하지만 나도 행복하지요. 퇴직하신 분들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겁내지 말고 도전하세요.”
이종구 기자 minjung@hankookilbo.com
NULL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