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과 장애, 인종, 성적 지향 등이 차별 핑계가 되지 못하도록 막는 ‘차별금지법’의 입법이 새 국회에서 추진될 조짐을 보이자 종교계가 다시 들썩이고 있다. “동성애가 허용되도록 길을 터줘서는 안 된다”는 보수 개신교계와 “이번에는 반드시 제정돼야 한다”는 진보 개신교계 및 불교계가 제각기 입장 관철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일 개신교 연합 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전날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이 서울 연지동 한교총을 방문해 위원회의 임무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 등 사업을 설명했다고 밝혔다. 차별금지법 문제와 관련해 한교총 지도부가 최 위원장을 만난 것은 처음이라는 게 한교총 설명이다. 현재 인권위는 국회를 상대로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거나 입법을 권고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면담 자리에서는 보수가 주류인 한국 개신교계의 입장이 한교총을 통해 인권위에 전달됐다. 한교총 공동대표회장인 김태영 목사는 “현재 인권위가 추진 중인 차별금지법은 결국 성소수자를 염두에 둔 특별법”이라며 “다수의 인권을 침해하는 역차별을 가져와 오히려 보편적 인권 정책에 역행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공동대표회장인 류정호 목사는 “이 법이 제정되면 우리 사회의 건강한 가치관이 파괴되고 성(性)윤리가 무너질 것”이라며 “저출산 문제로 인구 감소를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인구 정책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회정책위원장인 소강석 목사는 “사회적 약자 보호에는 백 번 동의하지만, 성소수자 보호가 목적인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모든 한국 교회 전체가 반대하는 법”이라며 “잠시 멈춰 서서 국민들의 진솔한 의견을 듣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교총이 밝힌 반대 이유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적실성 있는 평등 원칙을 구현하려면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도 충분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차별ㆍ협박은 기존 형법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으며 △차별금지법의 처벌 규정은 평범한 시민의 자유를 제약하고 동성애 반대자를 범죄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모두발언을 통해 “차별금지법 추진에 대한 기독교계의 우려를 경청하기 위해 왔다”고 말한 최 위원장은 교계 입장을 들은 뒤 “계속 대화하며 접점을 찾자”고 했다. 또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목사님들이 동성애에 반대하거나 반대 설교하는 것을 제재하는 조항은 없고 종교인들이 전도하고 소신을 밝히는 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회동은 비공개로 열렸다. 반(反)동성애 단체의 항의를 한교총이 의식해서다. 반동성애 단체들은 9일 인권위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한교총과 인권위가 차별금지법 야합을 획책하고 있다며 두 단체가 만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줄곧 차별금지법 제정을 국회와 정부에 촉구해 온 불교계는 21대 국회 출범을 기회로 여기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는 18일 시민단체 ‘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함께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를 위한 ‘국회 둘레 오체투지’를 진행할 계획이다. 오후 1시 국회 정문 앞에서 입장을 발표한 참가자들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국회 담장을 돌게 된다.
당일 오체투지에는 조계종 사회노동위 소속 승려들뿐 아니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집행위원인 트랜스젠더 박한희 변호사와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이종걸 집행위원장이 함께한다. 이 행사는 조계종 사회노동위가 올 1월부터 격주 목요일에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해오고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기도의 일환이다.
진보 개신교계는 불교계와 입장이 비슷하다. 이미 진보 성향 개신교 연합 기구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총선 이튿날인 4월 16일 정의평화위원회 명의 성명을 통해 “차별금지법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당면과제”라며 “21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을 조속히 제정, 시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차별금지법은 합리적 이유 없이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성적 지향,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를 빌미로 차별하지 못하게 하려는 취지의 법이다. 한국의 경우 유엔 인권이사회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한 2007년과 2010년, 2012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입법이 시도됐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현재 인권위는 차별금지법 명칭을 ‘평등기본법’으로 바꿔 거부감을 줄이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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