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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베를린서 묻다] 동독을 참조한 북한의 연방제, 남한의 국가연합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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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베를린서 묻다] 동독을 참조한 북한의 연방제, 남한의 국가연합과 다르지 않다

입력
2020.06.14 11:00
수정
2020.06.14 18:49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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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6ㆍ15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분단의 비극은 북핵 위험으로 더 증폭된 듯 하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가 독일 경험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글을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서 연재한다.

<4>한반도 평화의 북극성, 국가연합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직접 영접 나온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역사적인 악수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직접 영접 나온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역사적인 악수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 유령이 한반도를 떠돌았다. 국가연합이라는 유령이. 20년 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은 제2항에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 6ㆍ15 공동선언은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 합의한 첫 사건이었고 동시에 남북이 유사한 통일 강령을 가졌음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국가연합과 연방국가는 연방주의에 기초한 대표적 정치체 결합 형식이다. 그것은 중앙집권적 통합국가와는 반대로 연합 또는 연방을 구성하는 각 단위 정치체의 다원성과 자율성을 보장한다. 2000년 6월 중순 평양에서 마주 앉은 남북의 두 정상은 일방의 체제 흡수 방식이 아니라 서로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협력관계를 평화적으로 발전시켜 점진적으로 통일의 길로 들어서자고 입을 맞추었다. 연방주의가 평화의 시간을 감는 태엽이 되고 통일의 간이역이 되는 듯했다. 그 후 20년이 흘렀다. 발조는 엉켰고 열차는 멈췄다. 수리는 가능할까.

◇분단의 평화적 관리가 곧 통일

통일 대화와 관련해서라면 독일은 상당히 달랐다. 분단 시기 내내 동서독은 협정을 숱하게 맺었지만 통일에 대해서는 합의는커녕 어떤 논의도 진행하지 않았다. 애초 동독은 1950년대와 60년대 내내 서독을 향해 통일안을 줄기차게 쏟아냈다. 하지만 1968년부터 동독 정부는 새 헌법을 발표해 통일 강령을 지웠다. 심지어 동독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1970년부터 동독과 서독이 두 개의 서로 다른 민족임을 알렸다. 그들이 보기에, 동독은 오스트리아와 통일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독과도 통일할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 체제 안정과 권력 유지가 급했다.

1970,80년대 서독의 동방정치가들은 동독이 내부 결속과 독자 발전에 나선 현실을 고려해야 했고, 통일 논의가 선린 교류와 협력 관계를 방해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동방정책이 개시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할 때까지 서독 정부는 통일 논의를 완전히 접었다. 동서독 모두에게 ‘분단’은 곧장 적대의 원인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구조적) 폭력’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분단 ‘관리’의 실패 ‘행위’들이 긴장의 원인이었기에 분단을 이성적으로 조정하며 ‘유지’하는 것이 평화였다.

과장된 몸짓의 통일 주장이나 비현실적 통일 강령은 오히려 평화를 교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평화정치에 기초한 분단 관리가 결국에는 통일 ‘준비’였다는 사실은 당시에 아무도 몰랐다. 역설이었으니 행운이라 불러도 된다.

대선 패배 뒤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당시 민주당 대표가 1993년 1월 26일 영국 케임브리지대(大)로 떠나기 위해 찾은 공항에서 남은 정계 인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선 패배 뒤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당시 민주당 대표가 1993년 1월 26일 영국 케임브리지대(大)로 떠나기 위해 찾은 공항에서 남은 정계 인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반도는 독일과 같지 않을 수 있다. 의도치 않은 역설적 행운에 기대어 기왕의 통일 합의를 던져 버릴 이유는 없다. 다만 분단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는데 번번이 실패하면서 통일을 외칠 때의 허무함은 그새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평화 무능력을 몽환적 통일 축제로 가리는 일도 지겹다. 국가연합이든 연방제든 그것은 통일안이면서 동시에 평화질서 구상을 포함해야 한다. 국가연합의 첫 단계는 아니더라도 중간 단계쯤에서는 군사 대결과 안보동맹 문제의 해결책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들이 내건 통일안은 모두 독일과 직접 관련이 있었다. 먼저, 김대중은 야당 지도자로서 1993년 상반기 영국에 체류하면서 독일과 유럽의 학자들과 집중적으로 토론했다. 그것을 통해 그는 ‘남북연합’을 중심 내용으로 한 3단계 통일방안을 구상했다. 1990년대 초 독일이 서독의 일방적 체제 이식과 급속한 통일과정으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기에 김대중은 흡수통일의 대안으로 남북연합의 이행기를 제안했다.

◇북한의 연방제, 동독을 참조했다

반면, 북한이 ‘연방제’를 통일안으로 제안한 것은 이미 1960년 8월 15일이었다. 김일성을 자극한 이는 흐루쇼프였다. 그는 1960년 6월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을 만나 동독 정부의 국가연합 통일안을 참조할 것을 권했다. 그런데 동독 외무부의 자료를 보면,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은 이미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동독 외무부를 통해 당시 동독의 통일강령이었던 국가연합안과 관련한 자료를 모았고 수 차례 동독외교관들과 대화하며 학습했다. 그 결과 1960년 8월 북한이 처음으로 연방제 통일안을 발표했을 때 동독 외무부 분석가들은 그것이 동독의 국가연합안보다 “더 세밀하고 더 정확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평양의 정치가들은 동독의 국가연합안을 연구해 독자적인 통일안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혼란이 없지 않았다. 연방주의 사상에 익숙하지 않은 북한의 지도자들은 상당기간 동안 자신들이 주장한 연방(federation)을 외국어로는 ‘국가연합’(confederation)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1970년대 전반에야 연방제를 1국가 2체제로 이해하며 연방과 연합을 구분했다. 그렇더라도 기원과 배경 그리고 초기 구상을 놓고 보면, 북한의 연방제는 사실 국가연합과 유사했다. 그렇기에 20년 전 남과 북의 통일안 합의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남과 북의 정치 지도자가 국가연합 방식의 통일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국가연합 논의는 큰 진전이 없었다. 남북관계가 ‘가다 서다’를 반복해서 이기도 하지만, 학계나 정치권에서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흥미롭게도 분단 시기 독일에서는 국가연합 통일안이 넘쳤다. 정부 정책으로는 두 번의 시기가 존재했다.

1956년 말부터 1966년까지 동독은 국가연합안을 공식 통일정책으로 선전했고, 1989년 11월 28일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는 10개조 통일강령에서 국가연합의 이행기를 제안했다. 비록 1990년 1월 중순 콜 총리는 급속한 흡수통일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국가연합은 당시 백가쟁명을 겪었다.

바이에른당(바이에른주의 지역당) 소속의 초대 연방의회 의원이었던 헤르만 에첼. 아마존 닷컴
바이에른당(바이에른주의 지역당) 소속의 초대 연방의회 의원이었던 헤르만 에첼. 아마존 닷컴

◇국가연합, 서독의 보수가 주도

국가연합 통일안이 분단 독일에서 잠시나마 동서독의 정부 정책으로 등장한 데는 서독의 정치가와 학자, 언론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이를테면, 1956년 말 동독 정부에게 국가연합안을 자극한 사람들은 서독의 보수주의 정치가들이었다.

특히 바이에른당(바이에른주의 지역당) 소속의 초대 연방의회 의원이었던 헤르만 에첼은 이미 1954년 국가연합을 통한 동서독 통일 방안을 발표했다. 그는 보수주의자였지만 냉전 체제를 받아들인 동서독 분단을 두 개의 “중앙 집중주의 체제로의 강제 편입”으로 해석했다. 그것에 맞서 에첼은 연방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이고 진정한 연방주의 정치제도는 국가연합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에첼은 국가연합을 연방국가나 통합국가로 가는 이행기가 아니라 그 자체가 완결된 통일 형식이라고 보았다. 서독과 동독이 서로 다른 정치 사회 체제를 통합할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각 정치체의 다양성과 자결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첼은 직접 ‘경계인’으로 나서 동독과 소련의 정치가들에게 국가연합 통일안을 전달했다.

에첼의 자극을 받은 또 다른 서독 보수주의 정치가들도 국가연합안을 안고 분단의 경계를 넘어 동독 지도자들을 설득했다. 에첼과 마찬가지로 바이에른주 출신으로 당시 서독 재정부 장관이었던 프리츠 쉐퍼는 1955년과 56년 두 차례 동베를린을 비밀리에 방문해 소련 대사와 동독 정치가들에게 국가연합 방안을 타진했다.

1956년부터 1966년까지 동독이 국가연합안을 통일 강령으로 제안하면서 서독의 시민사회와 정치가들은 대안적 국가연합을 구상하며 다시 “공을 되받아 쳤다.” 그렇게 분단 독일에서 등장한 국가연합 통일안은 대략 30여개로 내용은 다양했다.

◇통일논의를 풍부하게 만든 국가연합

나누면 세 조류였다. 첫째, 에첼과 마찬가지로 삶의 다양성과 지역의 자치권을 옹호하는 연방주의자들의 국가연합론이다. 그들은 국가연합 자체를 평화체제이자 통일 형식으로 보는 입장을 선보였다. 둘째, 다수의 중립주의자들은 국가연합안을 동서독 양 사회경제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지향하는 ‘제3의 길’과 결합했다. 그들은 국가연합을 연방국가나 통합국가의 이행기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실용적 국가연합안 주창자들이다. 그들은 동서독 간 경제 협력에 초점을 두고 실제 이루어진 양독간 교류 발전의 성과에 기초해 국가연합을 선언하자고 주장했다. 사민당의 실권자였던 헤르베르트 베너가 1959년에 제안한 ‘독일경제공동체’가 그 중 하나였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신통치 않게 보았던 베너는 1979년에도 ‘독일경제공동체’를 통한 통일의 길을 주장했다.

독일경제공동체 구상을 밝힌 사민당의 실권자 헤르베르트 베너(왼쪽)와 동방정책을 추구했던 옛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 DPA 자료사진
독일경제공동체 구상을 밝힌 사민당의 실권자 헤르베르트 베너(왼쪽)와 동방정책을 추구했던 옛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 DPA 자료사진

독일은 국가연합으로 통일되지 않았다. 성공하지 못한 역사 경로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그저 지나간 것에 희망의 불을 지피기 위함만은 아니다. 국가연합은 분단 시기 내내 독일인들에게 ‘공통의 사유 공간’이자 ‘관계 발전의 기대지평’으로 존재했다. 그것은 평화정치를 자극했고 교류협력이 한발 짝 더 나아가도록 추동했다. 통일을 거부했던 녹색당 정치가들조차 1989년 12월 19일 “국가연합, 그것 말고 더 무엇이 있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유령은 느닷없이 나타나지만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오히려 국가연합이 한반도 평화 갈망의 북극성이 되면 좋겠다. 모양과 위치가 좀 달라 보인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다양함을 통한 풍성함이야말로 연방주의의 정신이니.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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