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5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군 첩보국 수장 알프레드 레들(Alfred Redl) 이 자살했다. 그가 1900년대 초부터 암약한 러시아 이중 첩자란 사실이 발각된 직후였고, 그의 자살은 국제 스캔들 무마와 첩보국 명예를 위해 군 참모총장이 명령한 사실상 처형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유서 격인 회고록 ‘어제의 세계’에서 저 사건을 제1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배후적 에피소드”의 하나로 꼽았다. 실제로 저 사건 이후 제국 수뇌부는 복수의 전의로 군을 달궜고, 1년 뒤 시작된 전쟁으로 제국은 해체됐다.
덜 알려진 사실은, 레들이 ‘은밀한 동성애자(closet gay)’였고 러시아 첩보국이 그를 협박해 첩자로 매수했다는 거였다. 레들 사건 이후 동성애는 개인의 ‘일탈’이 아닌 국가 안보의 문제가 됐고, 국가 권력은 동성애자에 대한 법적ㆍ제도적 억압ㆍ차별의 당위를 획득했다. 2차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세계는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까지 포개 동성애자 색출-처벌의 광기를 정당화했다. 1차대전은 반(反)동성애 전쟁의 서막이었고, 냉전기는 그 절정이었다.
40년대 말 미 연방정부는 군인ㆍ공직자 사생활을 대대적으로 들춰 동성애자 등 약 4,880명을 해고했다. ‘라벤더 공포(lavender scare)’가 그렇게 시작됐다. 50년 12월 미 의회는 ‘동성애자 및 변태 성욕자 공직 채용에 대하여’란 제목의 보고서를 채택했다. “(동성애자 등은) 정서적 안정감이 결여된(…) 안보 위협 요소(security risks)”라는 게 요지였다. 52년 발간된 미국 정신의학협회 ‘정신질환진단통계편람(DSM-1)’은 동성애를 반사회적 인격장애(SPD)로 규정했고, 이듬해 4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동성애자의 연방 공무원 고용 및 민간 계약을 금지하는 ‘행정명령 10450’에 서명했다. 게이는 ‘더러운 비밀(dirty secret)’을 지닌 정신병자이고, 윤리적 타락자(sinner)이며, 잠재적 범죄자(offender)였다. 저 명령은 1975년 제럴드 포드 정부 들어 폐지됐지만 ‘고용 절대 불가’ 규정만 사라졌을 뿐 차별은 여전했다. 인종 국적 종교 장애 성 지향 등에 근거한 연방 고용 계약 차별이 포괄적으로 금지된 건 95년 클린턴 정부 때였다.
델 마틴(1921.5.5~ 2008.8.27)과 필리스 라이언(1924.11.10~ 2020.4.9)이 1955년 최초 레즈비언 인권단체 ‘빌리티스의 딸들(DOB- Daughters of Bilitis)’을 만들고, 이듬해 소식지 ‘더 래더(The Ladder)’를 발간하고, ‘Homosexual’이란 말을 공식 명칭에 최초로 명시한 64년의 ‘성직자-동성애자 회의(CRH)’를 조직해 활동하던 시절, 미국 동성애자의 처지가 그러했다.
둘은 연인이자 동지로서 만 55년을 살며 인권의 새 길을 개척했고, 2008년 캘리포니아 주정부 및 대법원이 인정한 미국 최초 레즈비언 부부가 됐다. 합법 부부로 산 지 불과 74일만에 마틴이 별세했고, 지난 4월 9일 라이언이 “내 고양이(sweety-puss) 마틴”의 뒤를 따랐다. 향년 95세.
라이언이 마틴을 처음 만난 건 1949년 시애틀 프레스클럽에서였다. 한 전문지 기자였던 둘은 어느 날 동성애에 대해 얘기하게 됐고, ‘어떻게 그들에 대해 잘 아느냐’는 라이언의 질문에 마틴이 “내가 레즈비언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레즈비언’이란 단어조차 몰랐던 25세의 라이언이 처음(?) 레즈비언을 만난 거였다.(vogue).
오클라호마 털사(Tulsa)에서 태어난 필리스 앤 라이언(Phyllis Ann Lyon)은 46년 UC버클리(저널리즘 전공)를 졸업한 뒤 지역 신문에서 일하다 49년 시애틀로 옮겼다. 샌프란시스코 출신인 마틴(Del Martin) 역시 UC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주립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고교시절부터 여성에게 끌렸지만 그게 어떤 건지 몰랐던” 마틴은 19세에 한 남자(James Martin)와 결혼해 딸(Kendra Mon)을 낳고 4년만에 이혼했다.(nyt) 그 뒤 얻은 새 직장이 라이언이 다니던 신문사였다.
시절이 지금과 또 달라서, 내도록 눈치만 보던 둘은 53년 라이언이 시애틀을 떠나려던 무렵에야 비로소 연인이 됐다고 한다. 2008년 결혼식 직후 부부를 인터뷰한 가디언 기자는 라이언이 “남자들과의 성관계에서 경험하지 못한, 판이하게 다른, 매우 멋진 첫경험”을 고백하자 곁에 있던 마틴이 “조용히 흐뭇해했다”고 썼다. 곧장 샌프란시스코로 거처를 옮긴 둘은 56년 노밸리(No Valley)의 방 한 칸짜리 아파트를 구해 평생을 함께했다.
89년 ‘Making Gay History’ 인터뷰에서 부부는 당시 동성애자들은 대부분 “나 혼자뿐”이라는 고립감과 죄의식을 견뎌야 했다고 말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어서, 게이들이 은밀히 모이던 바는 당시에도 ‘노스 비치(North Beach)’ 인근에서 경찰의 수시 단속 위험을 감수하며 영업했다. 55년 부부는 거기서 ‘노니(Nonny)’라는 레즈비언을 만났고, 노니의 소개로 알게 된 5명과 의기 투합, ‘빌리티스의 딸들’을 설립했다. 단속 위험 없는 레즈비언들의 사교모임으로 시작된 DOB는 점차 각성하며 토론, 활동의 장으로 성장해갔다.
‘빌리티스’는 프랑스 시인 피에르 루이스(Pierre Louys)가 지은 산문시 ‘빌리티스의 노래(Songs of Bilitis, 1894)’에서 따온 것으로, 고대 그리스 여성 시인 사포(Sappho)를 연모한 작품 속 매춘부 이름이다. 그토록 낯선 이름을 붙인 건 물론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모임의 확장성에도 치명적이었다. DOB보다 5년 먼저 설립된 남성 위주 동성애자 단체 ‘매터신 소사이어티’와 교류하는 동안, 발기인 8명은 공개적인 활동을 본격화하자는 넷과 비밀 소모임을 고수하자는 넷으로 나뉘었다. 부부는 전자였다. 그들은 56년 10월 등사기로 민 첫 레즈비언 소식지 175부를 제작, 전화번호부에 등재된 미국 주요 여성 직업인들에게 우편 발송했다. 동성애 관련 문학 비평과 창작물, 뉴스 등을 담은 소식지 형식의 잡지 ‘‘더 래더 The Ladder’가 그렇게 탄생했고, 1년 만에 구독자는 400명으로 늘었다. 명단에 이름을 올리길 꺼린, 즉 레즈비언 혐의를 받을까 봐 두려워한 실제 독자와 후원자는 훨씬 많았다. 래더 표지 뒷면에는 ‘다른 존재들(the variant)에 대한 홍보 및 대중 교육’이라는 발간 취지가 적혀 있었다. 잡지는 초대 편집장 라이언(1956~60년)과 2대 편집장 마틴(60~62년)을 거쳐 월간-격월간으로 72년까지 발행됐고, DOB는 저 어두운 시대 “빛의 공간이자 레즈비언의 피난처로, 작은 기적처럼” 1970년까지 존속했다. DOB의 ‘딸들’은 대부분 가족과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상시적 두려움에 시달렸고, 개중에는 정신병원에 수용돼 전기충격 치료를 경험한 이들도 있었지만, DOB를 통해 점차 “세상에 나설 채비”를 갖출 수 있었다.
60년대 진보운동의 급물살을 타면서 동성애자 인권운동도 확산되고 대담해졌다.게이해방운동의 분수령인 1969년 뉴욕 ‘스톤월 항쟁’을 경험한 이들에게 DOB는 ‘늙고 고루한(old fuddy-duddies)’ 극복 대상이었다. 모든 변혁 운동이 성장통처럼 겪는 일이지만, 일부 ‘래디컬’들은 DOB를 조롱했다. 스스로 두른 ‘전위’의 광채에 눈멀어 자신들이 딛고 오른 ‘사다리(ladder)’를 못 보는 이들이었다.
마틴-라이언 부부도 자신들의 오류와 한계를 인정했다. 게이 커플의 이상적인 모델도 없었고, 페미니즘도 몰랐던 50년대의 그들은 집에서 보고 배운 부부 성 역할, 펨(여성 역할 레즈비언)과 부치(남자 역할)의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말했다. 라이언은 92년 인터뷰에서 “나는 잘 먹지도 않던 아침 식사를 마틴을 위해 준비하곤 했다”고, “하지만 부치 역할인 운전이나 못 박기 같은 것도 주로 내 몫이었다”고 말했다. 마틴이 방 한가운데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놓으면 참다 못한 라이언이 신발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말다툼이 격해지면 집을 나가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를 고백하기도 했다. 물론 둘의 성 역할은, 페미니즘 학습을 통해, 라이언의 싸움의 기술이 늘면서 점차 변모해갔다. 둘은 서로를 ‘아내’라 불렀다.
60년대 전성기 DOB는 시카고 뉴욕 뉴올리언즈 샌디에이고 LA 디트로이트 덴버 필라델피아 등 미국 주요 대도시에 지부를 두고 활동했고, CIA와 FBI의 감시 속에 1960년 샌프란시스코 전국회의와 64년 뉴욕회의를 열어 변호사 정신과 의사 등 강사들의 강연을 듣고 토론했다. 62년부터 주의회를 상대로 게이바 단속 등 차별법 개정운동을 주도했고, 그 일환으로 글라이드 메모리얼 연합감리교회의 진보적 성직자들과 함께 정치-종교운동 및 로비단체 ‘성직자-동성애자 회의’를 조직했고, 4년 뒤엔 ‘미국 성과 마약 포럼’을 개설해 운영했다. 대학원 성 전문가 양성 과정인 ‘인간 성 심화 연구소(IASHS)’ 설립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용맹스럽던 부부에게도 부모에게 커밍아웃 하는 건 힘겨운 숙제였다고 한다. ‘장군(the general)’이란 별명으로 불렸다는 마틴의 어머니에게 들킬까 봐 동생이 둘의 기사가 실린 신문 따위를 앞서 검열하곤 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부부에게 “다 좋은데 왜 뻔뻔스레 나대기까지 하느냐”는 말을 한 적도 있는데, 그들이 들쑤셔대는 바람에 ‘은밀한 연애’를 잘 영위해온 상류층 게이 커플 일부도 어머니와 유사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DOB 해산 후 부부는 전미여성기구(NOW)에 가입, 71년과 73년 기구 공식 페미니즘 의제로 레즈비언 차별ㆍ탄압 근절을 포함시켰고, 마틴은 NOW의 첫 레즈비언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71년 샌프란시스코 최초 동성애자 대중 정치운동기구인 ‘앨리스 B 토클라스 민주주의 클럽’을 결성, 동성애자 인권에 우호적인 의회ㆍ시장 선거 입후보자 공개 지원활동을 전개, 현 연방하원 의장인 낸시 펠로시 등 다수의 지역 출신 민주당 정치인들을 도왔다. 73년 미국정신의학협회가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빼는 데 기여했고, 78년 캘리포니아 주 의회 일부 의원들이 추진한 동성애자의 공립학교 취업을 금지 법안(Proposition 6) 저지 운동을 주도했다.
둘은 레즈비언 인권운동의 기념비적 저작인 72년의 ‘레즈비언/여성’과 73년의 ‘레즈비언의 사랑과 해방’을 공동 출간했고, 마틴은 76년 가정폭력에 관한 고전적 저서 ‘구타당하는 아내들 Battered Wives’를 썼다. 종교지 및 언론 매체 등에 기고한 글과 학생ㆍ활동가 대상 강연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레즈비언 운동의 상징이자 전설이었다.
2003년 캘리포니아 시장이 된 개빈 뉴섬(Gavin Newsom, 1967~) 현 주지사가 이듬해 시장 직권으로 동성애자 결혼을 허용하면서 첫 커플로 마틴-라이언 부부를 초대했다. 제도로서의 결혼에 심드렁했다는 그들은 전미레즈비언인권센터(NCLR) 사무총장 케이트 켄델(Kate Kendell)의 전화를 받고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커플들을 위해서” 그 제안에 동의했다. 시청 직원과 소수의 친구들 앞에서 “불과 4, 5분”동안의 형식적 예식을 치르고 둘만의 조촐한 외식을 즐긴 게 다였지만, 그들의 결혼식은 ‘동성혼 금지를 규정한 주법(Proposition 22)을 무효화한 세기의 사건이 됐고, ‘사랑의 겨울(Winter of Love)’이라 불린 그해 겨울 캘리포니아에서만 4,000여 쌍의 게이 부부가 탄생했다.
보수 교회단체 등이 제기한 소송에서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은 그해 8월 만장일치로 시장의 결정을 직권 남용으로 판결했고, 5대2로 이미 발급된 결혼증명서를 백지화했다. 마틴-라이언 부부는 10여 커플과 함께 대표 원고로서 반대 소송에 나섰고, 4년 뒤인 2008년 5월 주 대법원은 4대3으로 동성애자 결혼을 법제화했다. 그해 6월 다시 열린 마틴-라이언 부부의 결혼식은 더 성대하고 활기찼다. 신문들은 ‘새 시대를 연 결혼식 종소리’ ‘기다림은 끝났다’ 같은 제목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2004년 결혼식 때도 휠체어를 탔던 마틴은 2008년 다시 식을 올리고 74일 뒤 낙상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83세의 라이언은 “55년을 함께해온 동안 단 한 순간도 그가 내 곁에 없는 날이 오리라 상상조차 못했지만,(…) 우리가 결혼하는 날이 오리란 생각도 못했다. 지금 내 심정은 참담하지만, 델과 함께 누려온 최고의 사랑으로 위안을 얻는다”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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