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400년 이상의 암흑기를 버티며 살아남은 문자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공식 기록은 여전히 한자였으며 하급 관리들은 한자를 이용한 우리말 표기법인 이두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한글은 민간 영역에서 계속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한글이 공문서에 침투하자 숙종은 한글 공문서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한글이 공식 문자로 채택된 것은 갑오경장(1894년)에 이르러서였다.
한자가 뿌리내린 나라에서, 공적 효력도 없던 한글이 살아남은 비결은 무엇일까?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훈민정음 정인지 서문’에 나와 있듯이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에 깨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라면 배울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쉬운 것은 쉽게 만들어졌으리라 짐작한다. 그래서 한글도 수월히 만들어졌으리라 생각했다. 세종이 문창살을 보고 즉흥적으로 한글을 만들었다는 야담이 대표적이다. 이런 억측들은 1940년에 한글 창제의 원리가 담긴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해소된다. 한글이 음성학적 원리와 성리학의 세계관을 담아 창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간송 전형필이 없었다면 한글 창제의 원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을 테고 한글 창제에 대한 수많은 억측은 지금도 세를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간송은 일본의 조선어 탄압이 극에 달한 40년대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켜냈고 광복이 되자 기꺼이 원본을 공개하였다. 이후 전쟁의 화마를 피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노력 덕분이다.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의 평생이 담긴 간송 미술관에서 재정 문제로 보물 두 점을 경매에 내놓았다는 소식에 어떤 감정보다도 미안함이 앞서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강미영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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