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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에 진절머리 냈던 할머니를 위한 특별한 제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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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에 진절머리 냈던 할머니를 위한 특별한 제사상

입력
2020.06.12 04: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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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는 새 책 ‘시선으로부터,’를 통해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세랑 작가는 새 책 ‘시선으로부터,’를 통해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할머니’는 그간 한국 사회에서 가장 평평하게 그려진 존재 중 하나였다. 김치를 비롯해 직접 만든 반찬을 자식들에게 못 먹여 안달이었고, ‘손맛’은 기본으로 탑재돼 있어야 했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수호자이기도 해서, 자신이 겪은 차별을 딸자식과 손녀에게 대물림 하는 사람이었다. 희생이 정체성이고 헌신이 곧 자아인 존재였다. 자신만의 복잡한 서사를 좀처럼 부여 받지 못한 존재가 바로 할머니였다.

여기 ‘심시선’이란 할머니는 그 전형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정세랑의 새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는 혹독한 지난 세기를 가장 독창적으로 살아낸 심시선의 일대기, 그리고 그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자손들의 삶을 그린다.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피프티피플’ 이후 4년만의 신작 장편이다.

소설은 시선이 일흔아홉에 세상을 뜬 뒤 10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하와이에 열두 명의 자식, 손주, 며느리, 사위가 모여들면서 시작된다. 시선은 생전 제사에 대해 “죽은 사람 위해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는” “순전히 여자만 고생시키는” “사라져야 할 관습”이라고 진절머리 냈다. 그런 할머니를 기리는 제사니 여느 제사와 다르다. 큰딸 명혜는 가족들 각자가 하와이를 여행한 뒤에 가장 기뻤던 순간을 채집해 제사상에 올리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제사가 시작된다.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문학동네 발행ㆍ340쪽ㆍ1만4,000원

하필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는 건 할머니가 젊은 시절 한 때 살았던 곳이라서다. 시선은 전쟁 중에 가족을 모두 잃었다. 일본 유학을 떠난 오빠까지 간첩으로 몰렸다. 이 땅을 떠나야 했다. 해외 이주가 쉽지 않던 시절 ‘사진신부’(사진만 보내고 국제결혼하는 신부)로 위장해 하와이로 떠난다.

하와이에서 세탁부로 일하던 중 독일의 유명 화가 마티아스의 눈에 띄어 독일로 건너가게 된다. 하지만 화가로 키워주겠다던 당초 약속과 달리 마티아스는 시선을 잡역부, 모델로만 부리고, 시선은 결국 말레이 혼혈인 화가 요제프 리를 만나 독립하게 된다. 혹독한 인종차별과 따돌림을 피해 다시 한국으로 온 시선, 한국에서는 작가 등 전방위 예술가로 살아간다. 두 번의 결혼으로 얻은, 서로 다른 성씨를 지닌 아이들을 키우며.

소설은 시선이 남긴 책이나 방송 인터뷰와 축사 등의 기록, 그리고 자손들의 기억과 회고담을 교차시키며 진행된다. 전쟁과 학살, 인종차별과 편견, 가부장제와 독재 등의 시대 또한 교차한다.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SNS 성폭력과 여성혐오, 지독한 경쟁사회와 환경문제 같은 지금 시대의 문제가 함께 거론된다.

문제점과 마찬가지이듯, 그 문제들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모습으로 버텨냈던 시선의 유산 또한 자손들에게 전승됐다. 시선에게 강인함, 공정함,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루 나눠 받은 자손들은 ‘제사상에 올릴 물건 찾기’ 여정을 통해 그 해답과 만난다. 그리고 그 여정을 이끄는 것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제각기 튀어나오고 마모된 성격들은 흠이 될 수 없으며,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은 사라져야 한다던 시선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개성 넘치면서도 선한 인물이 살아남는 이야기는 정세랑의 전매특허다. 그 생존의 꼭대기에 ‘심시선’이라는 나이든 여성인물을 놓음으로써, 작가는 세대간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냉담한 시각을 반박해낸다. 굳건한 모계사회인 이곳에서는 다른 성별을 이유로 차별 받거나 서로를 상처 입히는 일도 없다. 그저 시선이 이룩한 멋진 세계를 함께 지키려는 인간들간 연대가 있을 뿐이다. ‘시선으로부터,’는 그 뒤 이어질 계보의 이름이 될 것이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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