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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브렉시트 선택했지만, 믿을 구석은 ‘외부의 힘’

입력
2020.06.13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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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엔 특허제로 해외 기술자 모아 산업혁명 일으키고

‘시티 오브 런던’ 금융특구에선 유연한 세제로 해외 자금 유입

최근엔 ‘혁신가 비자’로 인재 영입… 왕실도 스타트업 피칭 대회

영국 런던의 구도심 '시티 오브 런던'에 있는 왕립거래소 건물. 런던=인현우 기자
영국 런던의 구도심 '시티 오브 런던'에 있는 왕립거래소 건물. 런던=인현우 기자
※ 오늘날 세계경제는 우리 몸의 핏줄처럼 하나로 연결돼 있습니다. 지구촌 각 나라들의 역사와 문화, 시사, 인물 등이 ‘나비효과’가 되어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인문학과 경영, 디자인, 사회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경제학자의 눈으로 세계 곳곳을 살펴보려는 이유입니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에 한번씩 토요일 연재합니다.

<5>영국이 300년 이상 ‘세계중심’으로 군림한 비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린다. 세계 전역에 식민지를 두고 있어 해가 지더라도 식민지 어딘가 에선 해가 떠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식민지가 몇 나라나 되는지 정확히 세기도 어렵다. 어느 시기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숫자가 달라져서인데, 일례로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 인도 등은 영국 식민지 시절에 모두 한 국가였다. 20세기 초를 기준으로 한다면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한 국가는 60개국에 달한다. 20세기 이전까지 영국은 분명 세계 최강의 국가였다.

◇산업혁명 원동력된 ‘특허제도’

영국이 이처럼 세계 최강국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특허제도’가 있다. 17세기까지 영국은 산업혁명을 이룰 만한 제조와 기술 여건이 없었다. 오히려 성숙한 제조 여건을 갖춘 곳은 유럽 대륙의 여러 국가들이었다. 유럽은 시계공업과 철 가공업 등 제조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시계는 오늘날 스마트폰에 비견할 만큼 주요한 도구이자 일상생활의 가장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준 물건이다.

반면 영국은 농업 국가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 1623년 자국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기술자의 기술에 대가를 지불하는 특허제도를 전격 도입한다. 그러자 유럽 각지의 기술자들이 자신의 기술에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영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술자들의 역량이 결집되어 산업혁명을 촉발하게 되었고, 영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은 영국이 나라 밖의 힘을 성장의 발판으로 활용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산업혁명으로 경제력을 갖춘 영국은 여느 서구 열강 국가들처럼 식민지 점령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의 식민지 경영 방식은 다른 국가와는 사뭇 달랐다. 프랑스는 식민지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 방식을 선호했다. 식민지 현장에 프랑스 본국 인력을 직접 파견하여 관리 감독을 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프랑스 식민지는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됐다. 스페인의 식민지 경영 방식은 신분제를 이용하였다. 스페인 본국 출신은 최상위층으로,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에게는 그 다음 지위를 부여하였다. 다시 스페인 사람과 원주민 간에 태어난 사람들을 그 다음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스페인 각 지역의 식민지를 통치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달랐다. 영국은 자신들이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지 않는 대신 식민지 원주민 중 우호 세력을 전면에 세웠다. 원주민 통치자 뒤에서 이들을 지휘하는 간접적인 방식을 선호한 것이다. 식민지인 중에 우수한 인력을 영국에서 교육시켜 고위 관직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통치 방식은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 후에도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됐다.

영국의 식민지 국가들은 신생 독립국이 된 후에도 영연방국가(Commonwealth of Nations)로 남아 긴밀한 경제적, 정치적 교류를 해오고 있다. 심지어 4년마다 영연방국가 간의 올림픽을 개최하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1980년대 후반까지 영연방국가간에는 여행이나 유학, 취업 시 비자가 면제되고, 많은 품목에 무관세가 적용됐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영국이 국제사회에서 적지 않은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이번에도 영국은 영국 밖의 힘을 적절히 활용했던 것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24일 오후 런던 구도심 시티 오브 런던에 위한 바우 광장에서 금융권 종사자들이 술잔을 들고 브렉시트를 논의하고 있다. 런던=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저작권 한국일보] 24일 오후 런던 구도심 시티 오브 런던에 위한 바우 광장에서 금융권 종사자들이 술잔을 들고 브렉시트를 논의하고 있다. 런던=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금융업 발달 배경에도 ‘외부의 힘’이

영국에서 금융업이 발달한 배경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흔히 뉴욕을 세계 금융 중심지라 부르지만, 사실 뉴욕은 미국 금융시장의 중심지다. 자국 내 시장만으로도 충분한 기회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의 수도 런던은 진정한 국제 금융 중심지로 불릴 만 하다. 영국은 세계 외환, 주식 및 기타 금융파생상품의 30~50% 정도가 거래되고 있으며, 런던증시(London Stock Exchange)는 2015년까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를 제치고 세계 1위 증시였다.

영국에서 국제금융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는 거점 지역은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이라는 금융특구이다. 이곳은 런던의 32개구 중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특구이다. 시티 오브 런던에는 세계적인 기업과 부호들이 선호할 만한 느슨한 세제를 적용한다.

이러한 세제의 배경 또한 대영 제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 기업인들은 대부분 식민지에 거주하며 식민지를 기반으로 수익을 거두고 있었는데, 식민지에서 거둬들인 수익을 영국으로 반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에 영국은 식민지에 거주하던 영국인이 현지에서 벌어들인 수익에 대해 세금을 유예해 주는 제도가 도입했다. 이 제도는 최근까지 비거주지 규정(non domicile rule)으로 이어졌다.

이 규정은 영국에서 살더라도 본인의 실제 거주지가 영국 외 다른 나라라고 신고하면 해당 지역에서 벌어들인 수익에 대한 세금을 유예해주는 제도다. 최근에는 영국 부유층들이 이 법을 악용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집에서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호텔에서 생활하며 해외에 거주하는 것처럼 속인 뒤 세금을 유예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 같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느슨한 세제는 영연방국가들의 부호들을 비롯해서 러시아 재벌, 일본과 중국 부호들까지 전 세계 부유층의 돈을 유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기업들에게 적용되는 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타벅스는 1998년 이후 영국에 진출한 이후 30억 파운드, 약 4조4,000억원의 수익을 거두고 있지만 납세액은 150억원에 불과하다. 대부분 수익을 조세피난처로 숨기고 적자를 보인 것처럼 해 세금을 내지 않는 해도 많았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세 제도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추세긴 하지만 여전히 영국은 느슨한 규제환경으로 여러 기업들의 유입을 독려하고 있다.

◇브렉시트 택한 영국, 위기 돌파할까

이처럼 영국은 매 시기마다 영국 밖의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진화, 발전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바로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EU 탈퇴)를 통해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것이다. 브렉시트로 영국 경제의 불확실성이 확대되었고, EU 회원국 지위가 상실될 것으로 전망되자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다국적 기업들은 영국을 떠나 EU 역내로 이전하는 추세다. 이로 인해 최근 영국 경제는 기업투자 부진이 지속되고 가계의 가처분 소득도 하락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 등 주요 국제기구의 전망 역시 브렉시트 이후 영국 경제성장 전망치를 하향 조정해 왔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는 영국의 해법이 이전의 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무역에 드는 비용과 절차를 없애고, 세제 혜택을 부여하며 자유롭게 무역을 수행할 수 있는 자유무역항 제도를 적극 도입하였다. 법인세를 낮춰 아일랜드와 함께 유럽 내 최저 수준의 법인세 보유국임을 강조하며 역외 기업들의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자 한다.

최초의 산업혁명을 이끈 국가인 만큼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적지 않은 성과를 내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산업 분야는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이들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전략은 17세기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영국정부는 외국기업 이나 해외 엔지니어가 영국에서 혁신 아이디어를 상업화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특허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에 대해선 인하된 법인세(10%)를 적용하고 있다.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된 17세기의 특허제도를 연상케 하는 발상이다.

또한 해외 우수 인재와 스타트업을 유치하기 위해 2019년 3월부터 새로운 비자 제도를 도입하였다. 일명 혁신가 비자(innovator visa)로 영국에서 사업체를 운영할 계획이 있는 사람들에게 발급하는 비자다. 또한 영국에서 창업 시 보증기관이 해당 사업 아이디어를 검토한 후 비자를 발급해 주는 스타트업 비자(Start up visa) 제도도 도입됐다. 뿐만 아니라 자국 내 첨단 금융 시스템을 통해 창업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벤처캐피털, 크라우드펀딩, 엔젤투자가 등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

영국 왕실 또한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동참하고 있는데, 앤드루 왕자가 설립한 비영리재단인 피치앳팰리스는 지난 5년간 62개국에서 120여 차례 스타트업 피칭대회를 개최하여 약 800개 기업을 후원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런던은 2017년 글로벌 도시별 스타트업 생태계 비교에서 실리콘밸리, 뉴욕에 이어 세계 3위를 기록한 바 있다.

앞서 열거한 바와 같이 영국은 위기 때마다 늘 외부의 힘을 빌려 위기를 극복해 왔다. 영국이 브렉시트 이후 직면하게 될 새로운 위기 역시 ‘외부의 힘’을 활용해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박정호 명지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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