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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곰돌이 침대 시트가 소중했던 이유

입력
2020.06.11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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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천주교 신부(사제ㆍ司祭)는 크게 ‘교구 소속 사제’와 ‘수도회 소속 사제’로 나뉩니다, 모두 천주교에 속해 있지만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는데 그중 가장 큰 다른 점은 교구 사제는 ‘청빈서원(淸貧誓願)’을 하지 않고 수도회 사제는 ‘청빈서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개인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저는 수도회 소속 사제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개인 재산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원칙적으로’라고 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들 들어 옷이나 신발 그리고 휴대폰이나 노트북 컴퓨터 등 공동으로 사용할 수 없거나 공동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불편한 것들입니다. 그 이외의 가전제품이나 가구, 주방용품 등은 물론이고 베개나 침대시트 등 침구류도 공동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공동체로 이사를 가더라도 내가 살 곳이니만큼 내 취향에 맞춰 새롭게 꾸미고 싶기도 하지만 망가지거나 해져서 못 쓰게 되지 않는 이상 교체하는 일이 없으니 대부분 이미 있는 물건들을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게 됩니다.

보통 우리들은 특별한 의미가 있거나 혹은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한 오래된 물건보다는 새 물건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의미가 없다거나 혹은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해도 오래된 물건들에는 나름대로의 이야기나 의미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이사오기 전까지 사용하던 침대 시트는 귀여운 ‘곰돌이’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오십대의 남자가 사용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디자인으로, 알고 보니 저보다 훨씬 이전에 계셨던 신부님께서 어느 유치원에서 사용하고 남은 천을 버리기 아깝다며 얻어다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미 많이 낡았고 절대 제 취향도 아니라서 별 관심 없이 사용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볼 때마다 깜찍한 디자인과는 다르게 검소하게 생활하셨던 이전 신부님을 생각나게 하고 또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의미 있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새로운 공동체로 이사를 했습니다. 당연히 부엌이나 거실에 있는 가구나 물건들은 물론이고 제 방 또한 이전부터 있던 물건들을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습니다. 침대, 책상, 의자, 옷장, 일인용 소파 그리고 철제 책장 등 대부분 팔, 구십 년대에 제작된 듯한 오래된 물건들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소파는 아마도 응접세트로 제작된 것 같은데 집에는 오직 제 방에 한 짝만 있는 것을 보니 전에 계시던 신부님께서 어디서 얻어 오신 듯합니다. 철제 책장은 가정용이 아니니 이것도 어디선가 얻어 오신 듯하지만 어쩌면 그 당시 신부님의 취향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군데군데 약간 녹이 슬긴 했어도 책장으로 쓰기에 큰 불편함이 없어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제 방에 있는 물건들은 제 취향이나 선택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물려받은 물건들에 불과하지만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사연을 알게 되거나 또는 제 손때가 묻게 되면 ‘곰돌이 침대 시트’처럼 저에게 혹은 제 다음 사람에게 의미 있는 물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래된 물건들은 그 자체의 객관적인 값어치와 상관없이 각자의 이야기와 의미를 담고 있고 나의 관심이나 상황에 따라 이야기나 의미가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추억이나 감성이 스며들기 때문이며 이는 새것이 주는 산뜻함이나 편리함으로 대체할 수 없는 오래된 물건들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일 것입니다. 물건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 등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새로움과 편리함을 우선시하는 요즘 오래된 물건이 가지고 있는 ‘시간, 관심, 의미, 추억 등등’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양상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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