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지다, 한국인의 탐닉] <2> 트로트, 열풍 넘어 광풍으로
한국인 좋아하는 리듬ㆍ선율ㆍ가사에 발라드ㆍ댄스 가미 ‘화려한 부활’
2030 “심금 울리는 음악에 힐링, 부모님과 함께 들으며 대화 늘었어요”
“트로트에는 관심이 1도 없었어요. 엑소(EXO) 같은 K팝 가수 음악만 들었죠. 남편이 그래도 한번 봐보라면서 임영웅이 ‘바램’(원곡 노사연) 부르는 걸 보여줬는데 거기에 푹 빠져버렸어요. 그때부터 트로트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어요.”
전북 군산에 사는 주부 차수진(30ㆍ가명)씨의 음악 취향은 트로트 가수 임영웅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로 나뉜다. 차씨는 10,20대 때만 해도 아이돌 그룹 음악과 음원 사이트 인기 차트 상위권에 있는 음악 위주로 들었지만,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에 출연한 임영웅의 노래를 듣고 난 뒤엔 플레이리스트가 트로트 중심으로 바뀌었다.
“아이돌 가수는, 음악적인 것보단 외형적인 면을 보고 좋아했어요. 반면 임영웅 같은 경우는 음악이 마음을 움직이고 심금을 울린다고 할까요. 요즘 K팝이나 힙합 음악은 제게 조금 어려운 느낌인데 트로트는 쉽고 편하게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트로트는 구식이고 지루한 음악일 거라는 거부감이 있었는데 그게 사라진 거죠.”
경기 평택의 회사원 진선님(25ㆍ가명)씨도 ‘미스터트롯’을 보고 나서 음악 취향이 바뀌었다. 특정 장르나 가수보다 신곡 위주로 두루두루 듣는 스타일이었지만, 그간 트로트는 거의 안 들었다. 그는 “플레이리스트가 요샌 거의 트로트”라며 “전엔 트로트 가수 하면 부모님 세대만 좋아할 것 같은 이미지였지만 임영웅 같은 가수를 접하며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최근의 트로트 인기는 단순히 대중의 음악 취향 변화에서 멈추지 않는다. 세대 간의 공감과 소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차씨는 “부모님도 언니들도 모두 ‘미스터트롯’을 좋아해서 예전보다 대화가 많아졌다”며 “언니들과 콘서트 한번 같이 간 적이 없었는데 ‘미스터트롯’ 공연을 함께 보려고 예매도 해뒀다”고 말했다.
진씨도 트로트를 좋아하게 된 뒤 생긴 가장 큰 변화로 “가족 간 대화할 주제가 생겼다는 점”을 꼽았다. 부모는 물론 할머니와도 트로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젊어진 트로트’를 원인으로 꼽았다. “20, 30대가 정통 트로트를 찾진 않죠. 요즘은 트로트의 사운드 자체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젊은 세대도 좋아하게 만들기 때문에 남녀노소 좋아하게 되는 게 아닐까요.”
◇트로트 ‘열풍’ 넘어 ‘과열’로
트로트 열풍은 방송가를 휩쓸고 있다. 종합편성채널 TV조선의 ‘내일은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 방송인 유재석이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변신해 노래했던 MBC ‘놀면 뭐하니?’ 등의 기폭제였다. 오랫동안 변방에 밀려났던 트로트가 이제는 주인공 대접을 받는다. TV 프로그램엔 트로트 가수가 넘쳐나고, 광고에서도 드라마에서도 트로트 음악이 흘러 나온다. K팝, 발라드, 힙합 음악이 지배하던 음원 사이트에서도 트로트의 비중이 늘더니, 아예 트로트로 만든 뮤지컬이 제작되고 성악가 출신 트로트 가수 김호중의 삶을 조명한 영화가 제작된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트로트 기획사 JJ엔터테인먼트의 유병재 대표는 “남녀노소 트로트를 좋아하게 되면서 트로트 가수들이 설 수 있는 무대도 많아졌고 소속 가수들의 자신감도 커졌다”고 말했다.
KBS ‘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 외엔 트로트에 빗장을 단단히 채우고 있던 지상파 방송사들이 갑자기 문을 활짝 열고 나선 건 ‘미스트롯’에 이어 ‘미스터트롯’이 터트린 어마어마한 잭팟 때문이다. 지난 1월 방송을 시작한 ‘미스터트롯’은 비지상파 프로그램 중 최고 시청률인 35.7%(닐슨 집계 전국 가구 기준)를 기록했다.
‘미스터트롯’ 인기는 방송 종영 후 세 달이 지났는데도 여전하다. ‘미스터트롯’으로 스타덤에 오른 임영웅 영탁 장민호 김호중 등은 출연하는 프로그램마다 시청률을 끌어올리며 ‘예능 치트키’라 불린다. ‘미스터트롯’ 출연진을 다시 기용한 TV조선의 ‘신청곡을 불러드립니다-사랑의 콜센타’는 시청률이 23.1%까지 찍었다.
방송사들의 트로트 경쟁은 아찔할 정도다. SBS ‘트롯신이 떴다’, MBC에브리원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 이어, MBC ‘최애엔터테인먼트’, MBN ‘보이스트롯’, KBS ‘트롯전국체전’, SBS플러스 ‘내게 ON 트롯’, MBC ‘트로트의 민족’ 등이 속속 편성표에 오를 채비를 마쳤다. TV조선은 ‘미스터트롯’ 출연진을 내세운 또 다른 프로그램인 ‘뽕숭아학당’을 ‘트롯신이 떴다’와 겹치는 시간대에 편성해 SBS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과열 양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상황이다.
◇한민족의 문화적 DNA, 그게 트로트
트로트의 부활은 적잖은 의미를 지닌다. 대중음악 장르 가운데 가장 오래된 트로트가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대중의 사랑을 되찾은 건 트로트의 힘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미 오래 전 세계화한 댄스, 발라드, 포크, 록 등과 달리 지역색이 강한 장르이기에 한층 더 의미가 깊다.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좋든 싫든 트로트는 이미 한국인의 삶 속에 자리를 잡았다”는 점을 원인으로 꼽는다. 지난 30여년간 ‘다함께 차차차’ ‘찬찬찬’ 등 다수의 트로트 히트곡을 쓴 작곡가 이호섭씨는 “어렸을 때부터 학습된 리듬과 선율의 패턴이 몸 속에 형성된 것”이라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한민족의 음악적 DNA를 갖고 있어서 젊을 땐 트로트를 잘 듣지 않다가도 대체로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트로트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했다.
음악사학자인 장유정 단국대 교양학부 교수는 트로트 음악의 변신에 주목했다. 장 교수는 “국악의 5음계와 트로트의 5음계가 맞아떨어지는 등 트로트가 우리 민족성에 맞는 부분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시대에 맞춰 변신하면서 핍진성 있는 가사로 대중의 공감을 얻어왔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트로트는 계속 변해왔다. 초창기 일제시대에는 미국의 폭스트롯 춤곡과 일본 유행가에다 민요적 감수성을 더했다. 일제 말기에는 서정적 가사를 겸비한 고급 유행가로 큰 인기를 얻었다. 1950~1960년대에는 전후의 시대적 아픔을 노래했고, 1970년대 이후 비주류로 밀려난 뒤에는 포크, 록, 디스코, 발라드 등 다른 장르를 끌어들이고 한데 섞이면서 계속 변신을 시도했다.
◇왜색 아닌 한국인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야
1970년대 포크, 록 등 청년문화가 퍼지면서 트로트는 여러 차례 왜색논란에 휩싸이며 대중문화의 변방으로 내몰렸다. 경제성장과 함께 엘리트주의가 음악과 대중의 소통 창구인 미디어를 장악하면서 주류 음악 시장의 무대에 설 자리는 더욱 줄어들었다.
그렇기에 트로트가 변신에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주장이다. 장유정 교수는 “20세기 초 트로트가 일본에서 건너온 유행가의 번안 가요로 시작한 건 맞지만, 당시 일본의 유행가도 일본 고유의 음악이 아니라 서양에서 가져온 음악”이라면서 “기원을 따지는 것보다 어떻게 발전하며 고유의 정체성을 갖게 됐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로트가 일본 엔카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민요와 판소리가 일본 엔카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서양 음악을 받아들인 일본의 유행가가 한국으로 건너와 우리 음악과 결합해 트로트가 틀을 갖추게 됐다는 게 정설이다. 손민정 한국교원대 음악교육학과 교수는 “설사 트로트가 일본 유행가 영향을 받았다 해도 현재까지 이어온 과정 자체가 우리의 것이었고, 지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 또한 전통”이라면서 “단순히 음계나 박자만 놓고 볼 게 아니라 트로트의 소리적 측면과 가사적ㆍ정서적 측면, 오랜 기간 내재화된 과정까지 함께 봐야 한다”고 말했다.
트로트의 부활이 엘리트주의에 밀려 주변화된 서민 정신의 반란이라는 시각도 있다. ‘음악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식의 고정 관념에 억눌려왔던 대중의 열망이 ‘미스터트롯’ 같은 방송을 계기로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한 가요기획사 대표는 “얼마 전만 해도 트로트 가수가 출연할 수 있는 TV 프로그램은 극소수였을 만큼 방송 제작자들이 트로트 장르를 천대했다”며 “‘미스터트롯’ 같은 프로그램이 큰 성공을 거두자 유사 프로그램이 속속 나오고 있다는 건 방송사 고위층도 트로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뒤 트로트로 박사 학위를 받은 손민정 교수는 “학계에서조차 트로트 음악을 무시해왔다”며 “카니발 문화가 그렇듯 낯뜨거운 표현도 있지만 트로트는 감정에 솔직한 음악으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손 교수도 최근 트로트 인기를 “촌스럽고 서민적인 음악, 비엘리트ㆍ비주류 음악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시적 유행인가 진정한 부활인가
음악조차 지나치게 첨단화된 시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음악이 필요한 것이다. 50대 직장인 이주영씨는 “최근의 트로트는 거의 모든 장르를 포용해서 트로트와 비트로트 구분이 분명치 않다”며 “트로트의 맛을 살짝 얹은 익숙한 선율에다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가사를 겸비한 음악으로 탈바꿈한 것이 인기를 끄는 이유 같다”고 말했다. 트로트라는 장르가 인기라기보다 트로트 색채를 지닌 다양한 장르의 가요가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이다.
장유정 교수도 창법, 선율 같은 트로트만의 특징보다 대중과 호흡하는 보편적인 정서, 위로와 공감을 트로트의 강점으로 꼽았다. 그는 “최근 K팝이나 힙합 음악은 의미 없는 단어를 나열하는 경우도 많고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아채기 힘든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트로트 장르는 때론 비속어를 쓰더라도 진정성이 나오는 보편적 감정으로 희망과 감동, 위로, 웃음을 주며 삶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최근 트로트 열풍을 두고 일시적 현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최근 TV 음악ㆍ예능 프로그램에 주로 출연하는 트로트 가수는 주로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이거나 장윤정 남진 등 기존 유명 가수들에 한정돼 있다. 한 트로트 기획사 대표는 “최근 트로트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는 트로트 가수는 오디션 출신이거나 기존 스타 가수들뿐”이라며 “지금의 트로트 인기가 장기적으로 이어지려면 실력 있는 무명 가수들이 지방 행사가 아닌 TV 무대에 오를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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